전 세계 곳곳에 새로운 테러위협 요인 부상
원리주의의 덫에서 벗어나 다른 종교 인정해야
[보안뉴스= 이만종 대테러안보연구원장] 알라를 위한 것이라면 전쟁도 가리지 않는 무슬림들에게 ‘알라를 위한 전쟁’은 진정한 성전(Jihad)이라 할 수 있을까? 2014년 6월 29일 이라크 최대 유전 도시 모술을 장악한 극단주의 무장단체 IS는 ‘이슬람 국가(Islam State)’ 수립을 선포했다. 이라크와 시리아 영토를 침범해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까지 살해하고,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았다. 미국과 일본인 기자들을 납치해 참수한 뒤 이 장면을 SNS와 인터넷에 공개했고, 고대 유적지를 폭파하고 어린 소년들을 데려다 살인에 가담시키기도 했다.

[이미지=iclickart]
비록 참패해 영토라는 실효적 지배는 잃었지만 권토중래를 노리는 그들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IS 외국인 전사들도 각국에 새로운 테러 위협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동남아와 중동지역의 테러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은 이러한 행동을 ‘지하드(Jihad)’라 말한다. 아랍어로 ‘노력하고 투쟁하다’라는 뜻에서 유래한 단어이지만, 이슬람 경전 ‘쿠란’에서는 ‘알라를 위한 투쟁, 즉 성전(聖戰)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성스러운 전쟁을 치르는 지하디스트라 부른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는 진정한 성전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변질된 폭력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일반적으로 지하드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소지하드는 칼을 사용하는 지하드로 이슬람종교 및 이슬람공동체(움마)를 보호하고 이교도와 불신자들에 대항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대지하드는 마음 속에서 자기 자신의 악과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종교에서 말하는 자기 성찰이다. ‘쿠란’에서는 “정신과 언행으로 보여주는 대지하드가 오히려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하드의 의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공격적이고 과격한 개념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는 쿠란이 담고 있는 원래적 맥락 대신 물리적 투쟁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부여된 일종의 해석적 맥락일수도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도 지하드는 오스만투르크족이 대제국을 건설하고 보전할 수 있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십자군 공격을 받아 많은 피를 흘리고 결국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면서 이슬람 사회에서는 “공격적인 지하드가 신자의 의무”라는 생각이 피어나게 한 변곡점이 됐다는 분석이다.
그래서 이슬람법 ‘샤리아’에서도 지하드는 불신자들에 대항하여 전개하는 무장투쟁을 의미하고 있다. 이게 바로 오늘날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의 투쟁의 명분이다. 무슬림들이 쿠란을 신의 계시로 받아드리는 한 지하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로 인해 세계는 예측할 수 없고 예방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의 테러의 시대가 왔다는 점이다.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테러를 자행하고 이슬람 율법에 따라 세워지지 않은 문명과 유물은 모두 이단이라고 주장하며, 인류사의 중요한 유물들을 폭파하거나 처형장소로 활용하는 것은 결코 이슬람의 가치가 될 수 없으며, 야만적 전쟁범죄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의 이슬람은 비록 1400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전 세계 18억 명이 믿는 종교이지만, 신앙적 본질보다는 극단적인 무장단체의 폭력적 이미지로 연상된다. 더구나 최근 국내에서도 “무슬림이 한국을 장악해 ‘이슬람화’하려 한다”는 난무한 주장은 제주 예멘 난민 문제와 관련해서도 첨예하게 여론이 분열되고, 이슬람 포비아의 결정적 원인이 되고 있다.
승자 없는 이 분열과 논쟁, 그리고 끔찍한 전쟁과 테러, 어떻게 끝내야 하나?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다. 우선 서방의 입장에서는 서구물질 문명과 이슬람종교 문명의 심화되는 대립구도를 극복하기 위한 지적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목도하는 글로벌 이슬람주의 운동은 한 시대에 지나가고 마는 단순한 종교적 저항운동을 넘어서는 문명사적 현상이며, 패권적 서구문명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해야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된 이슬람세계의 아픔과 상처는 깊다.
반면에 극단주의 이슬람무장단체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도전과 좌절의 반복 대신, 경직된 원리주의의 덫에서 벗어나 서방과 다른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 무슬림의 연대를 통해 서방세력을 제압하겠다는 투쟁 노선을 버리지 않는 한, 아픔은 갈수록 깊어갈 뿐이다. 극단은 극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참화에 희생된 숱한 어린 영혼들을 위해서라도 평화는 미루어져서는 안 된다. 종교는 타락한 세상을 꾸짖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상을 인격적으로 설득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어떤 종교이던지 복음의 최종적 결론은 평화와 용서이다.
[글_ 이만종 대테러안보연구원 원장/호원대 법경찰학과 교수(manjong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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