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뉴스= 이만종 대테러안보연구원 원장]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유혈충돌이 반복되고 있는 가자지구의 총성은 오늘도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도 이스라엘은 비무장 팔레스타인 시위자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취재하던 팔레스타인 기자가 하마스 대원으로 판단되어 사살되기도 했다. 전쟁 범죄에 해당하는지를 놓고 국제적 규탄이 이어지지만,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테러에 대한 자위적 차원이었다고 항변한다.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이미지=iclickart]
왜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팔레스타인들과 이런 사태에 처하는 것인가? 강경한 진압을 하지 않고서는 과연 안보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해서일까? 미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국제사회는 오히려 팔레스타인의 비폭력적 반대와 시민 불복종을 지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시위하는 팔레스타인들에게 하마스라는 딱지를 붙이고, 폭력적 시위라는 프레임을 씌워 잔혹한 단속을 위한 명분을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인권을 존중하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사회는 시위대에 살상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게 국제법적 원칙이기 때문이다.
최근 팔레스타인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무장정파 ‘하마스’ 조직은 국제사회의 가장 큰 주목대상이다. ‘하마스’는 1987년 이스라엘 점령에 저항하는 1차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인티파다) 당시 결성된, 반 이스라엘 무장단체로서, 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집권당인 파타와 함께 팔레스타인 양대 정당으로 활동해 왔다. 온건성향의 파타와 달리 이들은 이슬람 국가주의를 앞세운 무장투쟁을 추구한다. 미국은 하마스를 1997년 테러단체로 지정했으며, 지도자인 ‘이스마일 하니냐’를 ‘특별지정 국제테러리스트(SDGT)로 분류한 상태다.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상반되는 핵심 이슈는 두 가지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반유대주의와 생존의 문제이다. 독일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를 제외하고도 유대인들은 지난 수천여년 역사를 통해 그들을 말살하려는 반유대주의에 직면해야 했다. 그래서 유대인의 인식 속엔 반유대주의적 사건을 접할 때 집단 트라우마가 작동된다. 이것이 하마스를 포함한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세력에 가차 없이 공격으로 대응하는 이유이다. 한마디로 투쟁을 통한 일종의 ‘시오니즘적’ 생존이다. 반면,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몰아내고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하여 하나된 이슬람 연합공동체를 건설하는 비전이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단순히 표면적 영토분쟁이 아닌 고대역사를 기반으로 한 종교, 역사, 민족 분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민족 간의 공존과 평화는 요원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린아이, 학교와 병원, UN 건물까지 폭격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까지 정당하다고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폭력에는 잘 대처하고 있지만, 비폭력적 반대를 대할 때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직 지혜를 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상징인 것처럼 행동하는 이스라엘이 수백만의 팔레스타인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는 이러한 행위는 이스라엘의 이미지와는 결코 맞지 않는 것이다.
양쪽의 분쟁은 뉴스에서 흔히 보도되는 도식화된 구도지만, 이제는 우리가 들여다보기 힘든 그들만의 상처와 역사의 아이러니를 잠시나마 다른 관점에서 환기시켜 보는 것도 필요하다. 보복과 증오, 공포의 피곤한 일상이 반복되는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의 평범한 소년이 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비통함과 흐트러진 비극의 역사를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짚어봐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현실로 마주하는 국제 질서라 하더라도 무고한 아이들과 시민이 죽어가고, 또한 이런 행위가 어떤 제지 없이 계속된다면, 더구나 그것이 어느 정도 정당한 것이라는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정의라 할 수 없고, 단지 강자패권의 야만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가 봐도 명백한 제로섬 게임인 이 상황은 우리가 당장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인류가 정말로 ‘진보’했다면, 이제는 상대방의 존재를 지워버릴 때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키는 악습을 끊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미국과는 우방인 우리의 입장에서, 팔레스타인과 한국과의 거리는 멀 수 있지만 같은 인류이기 때문에 그들이 갈망하는 평화라는 게 얼마나 힘겹고 요원한지를 절감하는 것뿐이다.
항상 전쟁과 테러는 ‘더 이상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모든 것을 부정한 뒤의 마지막 행동이다. 그래서 최선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희망을 가지고 ‘차악(次惡)’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평화로 가는 길일지 모른다. ‘최악’으로 향할 가능성이 농후한 최근 중동의 상황들이 조금이라도 ‘덜 나쁜 것’으로 반복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인류가 일궈내야 할 책임이다.
[글_ 이만종 대테러안보연구원 원장/호원대 법경찰학과 교수(manjong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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