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방해의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오용되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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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사이버의 의미
[보안뉴스 문가용] 지난 여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블랙햇을 뜨겁게 달군 건 여러 재미나고 신기한 보안 및 해킹 기술들만이 아니었다. 영화 펄프픽션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 프린트된 티셔츠가 종전의 히트를 기록했는데, 사무엘 잭슨이 총을 겨누는 그림에 “사이버라는 말을 한 번만 더해봐라...”라고 하는 말이 박혀있었다. 보안 담당자들의 마음 한 구석에 묵직하게 자리 잡았지만 미처 표현할 수 없던 감정을 어찌나 잘 담아냈는지.
요새 들어 ‘사이버’라는 말처럼 과용되고, 과용됨에 따라 의미를 잃어가는 것도 없다. 우리가 하는 말을 잘 되새겨보라. ‘정보의 고속도로’라던가 ‘웹 2.0’ 따위와 비슷한 말을 애매모호하게 하고 싶을 때 우리는 기꺼이 사이버라는 단어를 채용한다. 그리고 듣는 이에게 혼란을 일으켜 대화가 잘 통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정부기관 종사자들은 조금 더 강제적인 뉘앙스를 더할 때나 ‘사실은’, ‘좀’과 같이 그냥 말을 더듬는 고 짧은 순간에 의미 없이 붙이는 말 대신 ‘사이버’를 쓰고 있기도 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사이버 남용에 있어서는 유죄판결을 피해갈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는 내가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걸까. 가끔 일반 대중에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쉽고 간단히 설명해야 할 때 ‘사이버 보안’이라는 단어를 쓰곤 하는데, 그때마다 가슴 저편이 죄책감으로 찌릿찌릿하다. 이제 사이버라는 말을 대체할 다른 표현을 찾아야 할 때가 분명하다.
실제로 나는 토론회나 강연에 참가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 의견을 강하게 피력한다. 이미 그 자체로 독립적인 명사로 쓰이거나 무분별한 형용사로 사용되는 이 단어가 구글이 결국 동사가 됐듯이 동사의 영역까지 침범하기 전에 서둘러야 할 과업이라고까지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사이버했어요(해석 : 보안에 필요한 권고사항들을 잘 지켰습니다)’라거나 ‘그 놈들이 우리 회사를 사이버했어요(해석 : 국가가 운영하는 고도의 해킹 단체에게 당한 거 같아요)’라고 말하는 고객과 만나서 웃는 낯으로 상담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알콜 중독자들을 위한 갱생 및 치유 기관 등에서 하는 공통적인 말이 하나 있다면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치료의 첫 걸음’이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의 보안 상태에 대해서도 그 첫 걸음을 내딛어보자.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란 바로 ‘사이버’라는 단어 자체다. 우리말의 빈 공간을 꼼꼼히 채워주던 바로 그 마약 같은 단어 말이다.
어느 날은 보안과 전혀 관계없는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녀석은 “사이버만이 문제가 아니잖아? 빅 데이터, 클라우드도 모두 급박한 해결이 필요한 문제지”라고 말을 꺼냈다. 난 “모바일과 프로그램 개발 역시 시급한 과제”라고 답을 했고, 친구는 마치 목록이라도 끄집어내듯 뒤를 이어 온갖 IT 업계의 유행어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알아챘다. 사이버라는 단어가 가진 위해성을 말이다.
일단 이 단어 사이버는 이제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한 사람이 너무 많은 일을 할 수 없듯, 한 단어도 여러 개 의미를 모두 담아둘 순 없는 법이다. 부작용이 반드시 따른다. 가장 먼저는 이 단어가 들어간 내용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과, 그에 따라 소통이 단절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 친구 녀석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사이버를 붙임으로서 안다고 착각을 했을 뿐.
이미 군대 내에서는 실제 물리적으로 나쁜 놈들을 날려버리는 공격을 제외한 모든 것에 사이버라는 단어를 붙인다. 사이버의 의미가 공식적으로 ‘나쁜 놈들을 날려버리는 형태의 공격을 제외한 모든 것’이라고 결정되지 않는 이상 이 말을 이해하는 건 모두 제각각일 것이다. 군에 막 입대한 장교나 병사들, 실제 타국의 전선에서 오래 머물러온 군인들은 얼마나 어리둥절할까. 어리둥절만 하면 다행이다. 그냥 ‘응, 날 안전하게 지킬 기발한 수겠지’라고 믿어버리는 순간 군인들은 목숨을 보호하는 장치 하나를 잃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이버 전투요원이라니... 제발... 가뜩이나 현장과 문서의 차이가 벌어지는 게 심화되고 있는데 사이버라는 단어는 이를 가속화시키는 암과 같은 존재다.
그렇다고 사이버 이전의 단어를 가져온다는 발상은 더 심각하다. 예를 들어 정보보안 혹은 인포섹(InfoSec)이 있겠다. 이 두 표현은 전부 90년대에 그 종말을 고한 단어들이다. 정말로 정보를 보호하는 것이 다였던 당시에는 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 자체가 많이 달라졌다. 정보보호나 네트워크 보안도 역시 유통기한이 한참 전에 지난 표현들이며, 의미 자체가 지나치게 협소하다.
대안은 없는 것일까? 누군가 전혀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할까? 그저 ‘보안(security)’이라고 하면 부족한가? 사실 내 결론은 심플하고도 쉽고, 누구나 이미 이해하고 있는 그 단어 ‘보안’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건 정보보안이나 네트워크 보안이 아니라 그냥 보안 그 자체가 아니던가. 여기에 뭘 더 붙이고 첨가한다는 건 낭비일 뿐이다. 난 사이버보안 종사자나, 정보 보안 담당자가 아니라 그냥 보안 담당자다. 고객들이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안전하게 지키도록 보호하는 게 내 일인 것이다. 어차피 물리보안과 ‘사이버보안’의 경계가 급격히 흐려지고 있는 시대에, 네트워크나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공격들이나 실제 문과 창문을 깨고 넘어 들어오는 위협들이나 다를 바가 없어졌다. 이 보안이나 저 보안이나 우린 똑같이 ‘안녕’을 위하고 지킨다. 총을 가지고 몸을 방패삼는 경호원들이나 나나 귀중한 고객이 끔찍한 뉴스의 주인공이 되는 걸 방지하는 건 마찬가진데 굳이 소통을 번잡하게까지 하면서 구분지어야 할까?
물론 ‘보안’이나 ‘안전’으로 바꾸자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어느 곳에서건 다른 용어가 등장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바라는 게 있다면 그 말이 뭐가 됐든 보안을 직접 담당하는 사람들이 정했으면 한다. 말은 언제나 씨가 되는 법이고,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실제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실제 업무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즉 보안 일을 제일 잘 이해하는 건 보안 담당자들이고, 그렇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것도 보안 담당자라고 본다.
더불어 사이버를 어떤 단어가 대체하든 ‘보안’은 모든 생활 전반에 걸친 문화이지 현대의 사업 아이템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상을 타파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언제부터 보안이 금전적인 이윤을 위해 하는 일이던가. 돈이 잘 벌리지도 않고, 그러므로 자기만족과 보람이 일하는 동기 대부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적어도 그 자존심만큼은 곧추세워주는 그런 표현이 등장하길 기대한다. 아니, 고대한다.
글 : 존 딕슨(John Dic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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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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