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스피커의 발전과정과 보안위협 바로알기
[보안뉴스= 김주원 사이버보안 분야 칼럼리스트] 그리스 신화에는 님프(Nymph)라는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가 등장한다. 한국의 도깨비나 산신령 비슷한 존재인데,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산이나 강·골짜기 등에 머물면서 자연과 인간이 교감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기도 한다. 님프들은 서로 어울려 다니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재미나게 산다.

[이미지=utoiamge]
올림포스 산에서 거의 매일 사는 그리스의 신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고 관리하면서 하루도 안 거르고 올라오는 인간들의 민원도 들어줘야 하는 등 격무에 시달렸다. 인간들이 보기에는 올림포스 산에서 매일 밤마다 연회나 벌이며 놀고먹는 것 같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인간들은 물론 신들의 불만과 건의도 들어줘야 하니 제대로 쉬어보지를 못하는 처지였다. 그래도 가끔 숨을 돌릴 겸해서 님프들이 사는 곳에 찾아가 어울려 놀았다.
님프들 중에서도 가장 활달하고 아름다운 님프가 에코(Echo)였다. 그녀는 제우스가 놀러 오면 가까이에서 수다도 떨고 야양도 부리면서 제우스의 기분을 업(up)시켜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우스의 부인이자 결혼·가정생활의 여신인 헤라는 제우스가 또 님프들이 사는 곳에 갔다는 첩보를 받고 현장을 급습했다.
“다 알고 왔어요! 문을 여세요!”
제우스와 님프들은 헤라의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든 제우스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지 않으면 헤라가 제우스를 상대로 질투심을 폭발시키는 바람에 이 님프들의 거처가 엉망이 되리라.
노크 소리는 더욱 크고 거칠어졌다. 더 이상 지체하면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다. 제우스는 얼마 전 다산(多産)과 육아의 여신 레토를 임신시킨 것 때문에 엄청난 부부싸움을 한 상황에서 또 다시 헤라에게 시달리기는 싫었다.
“시간을 끌고 있어라. 나는 뒷문으로 빠져나가련다.”
에코는 문을 열고 헤라를 맞이했다.
이미 다 알고 온 헤라는 에코를 다그쳤다.
“제우스를 어디에 숨겼니? 빨리 나오라고 해라! 아니, 거기로 가자!”
에코는 흥분한 헤라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헤라님, 진정 좀 하세요. 오랜만에 오시자마자 이리도 매섭게 다그치기만 하시면 정신이 없잖아요. 차근차근요. 우선 여기 소파에 앉으시고요, 곧 좋은 와인을 가져올 테니 한잔 쭉 드세요. 저희랑 와인 좀 드시면서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에코는 원래 말하는 것을 좋아해서 다른 이들과도 잡담이나 논의를 할 때 마지막 말까지 다 자기가 했다. 그런 에코는 이번에도 와인을 홀짝이며 앉아있는 헤라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들을 풀어냈다. 헤라도 ‘올림포스 산에서도 유명한 수다쟁이’ 에코가 꺼내놓는 이야기들이 재미나서 정신없이 귀를 기울였다.
결국 한참 후에야 제우스가 도망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제우스는 유유히 현장을 탈출한 뒤 자신의 거처인 파르테논 신전의 옥좌에 근엄한 표정을 짓고서 앉아있었던 것이다. 마치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던 것처럼…. 측근에게서 이를 보고받은 헤라는 분노해 와인 잔을 바닥에 던져서 깨버렸다. 씩씩거리고 있노라니 제우스를 놓친 것보다 자신을 가지고 논 에코가 더욱더 가증스러워졌다. 헤라는 원래 제우스에게 쏟으려고 했던 분노를 에코에게 퍼부었다.
“고작 님프인 네가 감히 신들의 왕후인 나를 농락했다는 거지! 그래, 너 맛 좀 봐라! 너는 네 혀를 잘못 놀린 죄로, 앞으로 모든 이들이 하는 말을 그저 따라만 하게 될 것이야!”
그때부터 에코의 수다스럽던 입은 굳게 닫혔다. 그녀는 헤라에게 자신이 왜 제우스를 위해 시간을 벌어야 했는지에 대해 변명하고 싶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에코 주변의 다른 림프들도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는 선처를 베풀어달라고 헤라에게 애원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에코는 남들이 하는 말을 따라만 하는 처지가 되자, 같은 님프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그녀가 연모하던 나르키소스와도 헤어져 결국 깊은 산속 동굴에서 홀로 살게 되었다.
에코는 야위고 점점 쇠약해지면서 아름다운 몸마저 잃어갔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헤라의 저주에 따라 남의 말에 반응하는 목소리뿐이었다. 그래서 에코는 지금도 깊은 산속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을 따라하는 메아리로 존재하고 있다.
어느 날 퇴근해 집에 왔더니 TV 앞에 둥근 스피커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말로만 듣던 인공지능(AI) 스피커란다. 음악 듣기, 대화, 정보 검색뿐만 아니라, 리모컨을 사용하지 않고도 원하는 채널을 시청하거나 VOD를 감상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잘 알아듣고, 엉뚱한 질문에도 재치 있게 답변도 한다. 한마디로 손가락 까딱하지 않아도 스피커만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이러한 스피커가 자동차에도 장비되어 운전하면서도 전화를 하거나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인공지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엄밀하게는 ‘음성인식 시스템’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질문하는 음성을 인식하고 검색엔진을 돌려 나온 결과값을 다시 음성으로 변환해 제공하니까 말이다.
2014년 11월 세계적 온라인 쇼핑몰 회사인 아마존은 인공지능 플랫폼 알렉사(Alexa)를 개발했다. 알렉사라는 이름은 고대 서구에 알려졌던 지식을 거의 모두 저장하고 보관한 것으로 유명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공지능으로서의 알렉사에 대한 아이디어는 1966년부터 방송된 미국 SF 드라마 <스타트렉>에서 등장하는 우주선 ‘엔터프라이즈’의 인공지능 컴퓨터였다고 한다. 엔터프라이즈의 컴퓨터는 주인공들이 말을 걸면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정보를 제공한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회장은 알렉사를 탑재한 자동차나 가전제품 등 모든 기기의 사용자가 알렉사에게 질문하면 알렉사가 이를 인식해 응답도 하고, 사물인터넷(IoT)이 적용된 다른 제품들도 조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첫 단계로 음성인식 시스템과 연동되는 스피커를 출시했는데, 바로 ‘아마존 에코’가 그것이다.
에코의 시제품에는 단순한 주사위 굴리기나 가위바위보 등을 할 수 있는 기능만 있었지만, 이후 쇼핑, 일기 예보, 음악 청취, 사건․사고 신고 등을 할 수 있는 시스템도 추가되는 등 인간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해주는 기능들이 지금도 계속 추가되고 있다. 그래서 사실 아마존에서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 스피커가 출시된 지 1년 만에 인공지능 스피커 시장은 약 4천억 원 이상의 규모로 성장했다.
에코가 이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어도 한국에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에코가 영어 및 일부 외국어 서비스만 지원할 뿐이며, 아쉽게도 아직도 한국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서 인공지능 붐이 갑자기 일어난 이유는 2016년 3월에 개최된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대회 때문이었다. 만일 한국에서 이세돌과의 대결이 아니라 커제와 중국에서 대결하는 대회만 열렸다면 한국에서 지금과 같은 인공지능 붐이 일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파고가 이세돌을 4대 1로 이겼던 날, 한국은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미 전 세계가 인공지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터라 인공지능에 대해 허둥지둥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무료한 아저씨들의 놀이’ 정도로 인식되는 바둑이 한국을 ‘인공지능 후진국’이 되는 상황에서 구한 천우신조(天佑神助)가 된 셈이다.
그런데 “인공지능 스피커도 실은 그냥 스피커잖아?”라고 생각할 텐데, 대개 일반인들은 스피커(speaker)란 ‘스스로 말하는 기능이 있는’ 들을 때 쓰는 도구이고, 마이크(mic)는 말할 때 쓰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의 처지에서 생각하니까 ‘들을 때 필요한 도구’지만, 기기 측면에서 보면 ‘말하는 도구’인 것이다. 그런데 스피커와 마이크는 구조가 같다. 스피커는 전기 신호를 소리로, 마이크는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꾸어주는 변환 장치이기 때문이다.
종이나 갈댓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주한 뒤 엄지손가락 아래 빈 공간을 향해 힘차게 불면 바람이 지나가면서 공명 현상이 발생하면서 소리가 난다. 이러한 원리를 응용해 얇은 판이나 종이가 공기의 흐름이나 진동을 통해 소리를 만들어내게 한 것이 스피커다. 여기에 전기 신호로 그 진동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게 해 아름다운 음악이나 목소리를 재현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첩보에 사용하는 예도 있다.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공기 중에서 음파가 대화의 상대방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음파는 상대방의 귀뿐만 아니라 대화하는 이들의 주변으로도 퍼진다. 벽과 문과 창문에도 부딪친다. 벽이나 문은 대개 음파를 흡수하지만, 창문에 부딪힌 음파는 반사된다. 이 과정에서 창문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래서 창문의 떨림만으로도 내부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첩보 장비가 나온 것이다. 무려 냉전 시대인 20세기 후반에 말이다.
실내에 있는 스피커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실내에서 이야기할 때 발생하는 소리는 창문뿐만 아니라 실내 천장에 부착된 공청용 스피커도 미세하게 진동시킨다. 결국 스피커를 통해 전기 신호가 흐르게 되는데, 외부에서 이 스피커에 수집 장치를 연결하면 방에서 대화하는 말을 도청할 수 있다.
최근에는 실내에 있는 전등의 움직임에서 음성을 추출하는 기술이 발표되었다. 2020년 6월 이스라엘의 한 연구소에서는 방 안에 놓인 전구의 진동을 계산해서 음성을 복원하는 기술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런 기술들 때문에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첩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대화할 때 음악을 크게 틀거나 메모지를 사용하는 게 나온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카카오톡도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할 때에는 문자 입력을 위해 키보드를 누른다. 이때 문자열들에서는 고유한 주파수가 미세하게 발생한다. 역시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는 장비가 키보드에 입력되는 내용을 멀리서도 수집할 수 있다. 컴퓨터도 내용을 화면상에서 보여주려면 신호정보를 모니터에 쏴줘야 하는데, 결국 이 정보도 전자파이므로 모니터뿐만 아니라 주변으로도 퍼진다. 이러한 미세 전자파를 수집하면 컴퓨터 사용자가 보는 화면에 어떤 내용이 떠있는지도 멀리서 파악할 수 있다.
에코와 같은 인공지능 스피커도 보편화되면서 지금까지 설명한 정보 수집 방법보다 좀 더 쉬운 방법들이 제시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 스피커를 해킹하거나 ‘트로이 목마’와 같은 악성 코드를 심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사용자들은 인공지능 스피커를 비활성화시키지 않고 종일 동작하도록 설정해놓는다. 해커는 이러한 스피커를 통해 실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활동들을 파악하고, 심지어 인공지능 스피커를 통해 다른 사물인터넷 적용 기기들에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 대화를 엿듣는 도청기로도 악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오늘 일정 좀 보여줄래?”라고 인공지능 스피커에 명령한다면, 인공지능 스피커는 구글 홈의 자기 계정에 접속해 달력을 활성화하고 일정을 확인한 뒤 사용자에게 알려줄 것이다. 이러한 계정에는 사용자의 은행 계좌와 즐겨 찾는 홈페이지의 주소 등 안전하게 보관되어야 할 개인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정보가 암호화되어 있을지라도 인공지능 스피커와 정보를 공유하게 된다면, 해커는 중간에서 스니핑(sniffing) 도구로 그 정보를 절취할 수 있다.
해킹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손쉽게 인공지능 스피커를 악용하는 기술도 개발됐다. 2019년 11월 미국 미시간 대학과 일본 전기통신 대학의 연구팀들이 멀리서 인공지능 스피커에 레이저를 쏴 스피커를 조종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스피커가 인식할 수 있는 수준의 진동을 만든 뒤, “차고 문을 열어줘!”라고 명령하면 인공지능 스피커가 자신과 연동되는 기기를 호출해 차고 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빛과 음파로 인공지능 스피커와 같은 스마트 기기를 조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위협을 예상치 못했을 인공지능 설계자는 앞으로 이러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고민해가며 설계해야 한다. 물론 인공지능 기기가 보편화되기 전에 말이다.
요즘은 인공지능 스피커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주인이 좋아하는 채널이나 선호하는 VOD 등이 무엇인지를 미리 학습하고, 주인이 “재미난 것 좀 알려줘 봐!”라고 명령하면 우선순위를 추론해 알려주기까지 한다. 심지어 보일러나 가스레인지도 조절하고, 음악에 맞춰 조명 색깔이 바꾸어준다. 우리 집 반려견보다 더 똑똑한 것 같다.
반려견과 달리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한 인공지능 스피커를 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매력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아마 머지않아 저 테이블에서 내려와 움직이고, 말 한마디에 음료수를 옆에 가져다주는 인공지능 로봇으로까지 진화한다면 주인의 총애를 놓고 반려견과 신경전을 벌이지 않을까 싶다.
헤라의 저주를 받았기에 들어가 있어야 했던 깊은 숲을 빠져나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에코. 우리 곁에서 원래 님프의 역할대로 수다를 떨 날이 가까워진 것 같다.
[글_ 김주원 사이버보안 분야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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