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보안, 마땅한 해결책 아직도 없어
[보안뉴스 문가용] 박경리 작가하면 모두가 떠올리는 ‘토지’와 얽힌 개인적인 일이 하나 있다. 결혼에 드는 여러 가지 허례허식들을 없애야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척결해야 할 건 ‘과도함’이지 그 문화의 본바탕에 깔려 있는, 하나라도 더 손에 쥐여서 자식들 떠나보내려는 부모 마음 자체야 어찌 꺾을 수 있을까. 게다가 처음 그 커다란 행사를 맞이한 부모는, 자식들 생애 내내 해주었던 굳건한 버팀목과 지지대의 역할을 기꺼이 벗어던지고, 무경험의 초심자가 되어 버린다. 같이 설레고 같이 잠을 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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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나가 어머니셨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챙겨주고 싶었던 대상이 원빈보다 잘 생겼다고 말 더듬어가며 칭찬하시던 장남이 아니라 생판 처음 보는 예비 며느리였다는 것과 사실은 아무 것도 줄 수 없던 집 사정이었다. 고민을 거듭하시다 새 반지 대신 수십 년 전 당신이 받으셨다가 서랍에 보관만 해오시던, 나보다 늙은 예물을 주시고, 평생의 골칫거리(아니, 여태까지는 원빈이라고 하셨잖아요?) 가져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주셨다. 그리고 또, 이건 꼭 언젠가 며느리한테 주고 싶었다며, 엉뚱하게도, 늘 책꽂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던 토지 한 질을 주셨다.
왜 하필 토지 전집이냐고, 이 16권짜리 대하소설이 특별히 문학에 심취하지도, 박경리라는 작가를 아낀 것도 아닌 평범한 소시민인 어머니께 무슨 의미인가, 물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바람에 이 이야기는 사실 여기까지다. 지금도 어머니 며느리의 책꽂이엔 산업시대의 타자기로 친 듯한 글자체와 세월에 빛바래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건지, 갱지에 가까운 종이의 토지 구본 한 질이 먼지를 쌓고 있다. 이제야 원빈과 자신이 다르게 생겼다는 걸 깨달은 장남이지만 토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미스터리다.
어렸을 때 어머니 따라 옆에서 꾸역꾸역 오기로 읽었다는 것 자체만 기억나지 토지가 그렇게나 유명한 작품이 아니었다면 줄거리조차 몰랐을 법한 이 긴긴 책을 순전히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펼쳐 들었다가 다시 놓기도 여러 번 했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자들 성경을 독파하려다 창세기만 수없이 읽듯, 나 역시 故 박완서 작가의 머리말만 달달 외우다시피 읽게 되었다.
사실 그 머리말에서 토지 독파를 번번이 포기하게 된 건 박완서 작가의 증언이 국민 독서량이 전 세계 하위권인 나라에서 글자 파는 일만 계속해온 기자에게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토지가 연재될 당시 버스 기사님들도 ‘이번 회차 토지를 읽었느냐, 어떻게 토지를 모를 수 있느냐’고 되물을 만큼 ‘문학이 민초의 삶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물론 박완서 작가는 ‘그것이 박경리 소설의 힘’임을 강조하기 위해 쓴 말이다. 당시라고 해서 책 못 읽은 사람 입에서 지성 충만한 가시가 돋았을 리가 없다. 박경리가 토지로서 이룬 그 수많은 성취 중 ‘문학을 대중의 것으로 만들었다’로 요약한 박완서 작가의 정리는, 그 이름 없는 민초 중 하나였던 어머니의 기묘한 결혼 선물이 바로 그 박경리 작가의 토지였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한 설득력을 가졌다.
대중에게 다가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대중화는 콘텐츠를 생성해내는 사람들에겐 꿈과 같은 단어다. 요즘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이돌들, 예술성에는 늘 의심을 받곤 하지만 지금 무대에 오르기까지 매미 유충들처럼 아무도 모르는 연습실에서 수년을 훈련해왔다는 사실만큼은 모두가 인정한다. 국민 MC 유재석은 어떤가? 2000년대 초반 슬슬 이 오래된 중고 신인의 출연이 잦아진다고 느낄 무렵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은 ‘재미없는 유재석 요즘 왜 저렇게 나오는지 모르겠어’라고 툴툴대기도 했었다. 유튜브 최고 조회수의 싸이도 이미 한국에선 꽤나 경력을 쌓은 가수였다.
연예계만 이런가? 수년 전 정치판에 혜성처럼 등장한 안철수 의원 역시 요즘 말로 갑툭튀 한 게 아니라 이미 정보보안 기업의 CEO로서 인지도를 다져왔었다. 춤 잘 추고 어리고 예쁜 ‘비주얼’ 아이돌만 좋아하고,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다는 대중은 의외로 꾸준함을 날카롭게 기억하고, 또 후한 점수를 주는 것도 같다. 토지 역시 연재 1회부터 박경리 작가를 통영의 딸로 등극시키지는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민초로 깊이 깊이 스며든, 24년의 집필 기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난 주 송유근 씨의 박사학위 논문이 큰 논란이 되었다. 자연히 그가 천재다 아니다 논쟁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관련하여 가장 인상 깊이 본 글은 송유근 씨와는 사뭇 다른 ‘천재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신석우, 공유식, 김영훈 씨 등 13명의 인물들이 중고등학교 때부터 올림피아드, IMO 등 권위 있는 대회에서 상위권에 입상하며 서서히, 단계별로, 꾸준히 두각을 나타냈다는 게 그 차이점이라고 짚어낸 네티즌은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미디어의 호들갑 때문에 아무런 업적을 쌓을 기회도 없이 천재란 타이틀을 곧바로 얻은 송유근 씨에게 진위보다는 안부를 묻는 것 같았다. 단련의 기회도 없이 대중의 품에 안겨 버린 당신의 ‘멘탈’이 괜찮냐고 말이다.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를 봤을 때 정보보안은 반드시 대중화가 되어야 할 분야다. 그러나 아직은 요원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오죽하면 본지에서 11월에 진행한 설문에서 정보보안이라는 직업에 대해 가장 많은 응답자가 ‘업무 자체가 너무 힘들다’며 ‘후배에게 권할 직업이 못 된다’라고 우는 소리를 했을까.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을 지금 소수의 전문가들이 하고 있으니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페이스북의 보안 담당자인 크리스 브림(Chris Bream)은 보안의 문화화를 위해 “지속적인 소통과 참여 기회 제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모두가 참여하는 보안’이 잘 생긴 캐치프레이즈가 아니라 치열한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갑자기 등장한 천재보다 수십 년을 한 결 같이 백지를 채워갈 수 있는 박경리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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