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 연상케 해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탈출작전
[보안뉴스 성기노 기자] 영화 ‘덩케르크’(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가 개봉 첫 주 한미 박스오피스 1위를 점령,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만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감독의 전작 ‘인터스텔라’보다 높은 흥행 수익을 거두며 세계적인 ‘신드롬’을 이어가고 있다. 거의 80여년 전 전쟁 이야기가 왜 이토록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일까. 놀란 감독의 생생한 현장 묘사도 인상적이지만 ‘덩케르크’를 둘러싼 당시의 절박했던 ‘철수’ 상황도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 큰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을 경험한 우리에게는 ‘흥남철수작전’을 연상케 한다는 이야기도 많다.
▲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출처=네이버 영화]
사실 덩케르크의 원래 작전명은 ‘다이나모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배경은 독일군의 기습공격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했던 연합군이 고육지책으로 일단 후퇴를 하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2차 대전 개전 초기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대전의 서막을 알렸다. 폴란드 서부를 점령한 독일군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본격적인 공격을 회피했기 때문에 한동안 ‘기묘한 전쟁’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0년 4월이 되자 독일군은 북유럽이나 서유럽 국가로의 침공을 시작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회피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드디어 1940년 4월부터 본격적인 서유럽 접수작전을 펼친 것이다. 이때 독일군의 전력은 압도적이었다. 몇 년 동안 군비를 착실히 증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바로 이 과정에서 생긴 연합군의 처절한 후퇴작전이었다. 개전 초기 막강한 독일의 군사력에 연합군은 한없이 밀릴 수밖에 없었고 그 대표적인 경우가 덩케르크 후퇴작전으로 나타난 것이다.
1940년 5월, 독일군은 프랑스-벨기에 국경지대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고 그대로 영국 해협을 향해 서쪽으로 밀고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연합군은 둘로 갈라졌고, 영국군은 퇴로를 차단당한 채 해안에 고립되고 말았다.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육군 원수 고트 경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병사들을 구출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린 뒤,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해안으로부터 철수 계획을 세웠다. 독일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놀란 연합군은 반격할 ‘용기’가 아예 없었고 일단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 강했다. 이때 영국 특유의 ‘실용적’인 군사전략이 드러난다. 영국군은 ‘군의 후퇴는 치욕’이라는 말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오로지 ‘소나기는 일단 피한 뒤 생각하자’는 전략 속에서 연합군의 안전한 후퇴만을 위해 사력을 다했던 것이다.
연합군은 일부 지역에서 반격을 개시했으나 실패했고, 점점 독일군에 떠밀려 서쪽 해안가 주변으로 포위되고 있었다.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퇴로가 없는 연합군을 짓밟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포위망에는,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계속되는 연전연패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영국·프랑스·벨기에의 군인 수십만 명이 갇혀 있었다. 프랑스 군 지휘부는 포위망 내부와 외부에서의 동시반격으로 이들을 구원한다는 계획을 실행하려 했으나 사실상 불가능했고, 영국군은 영국군대로 본토에 남은 전력을 최대한 빨리 보내 구원코자 했으나, 그 시점에서 구원군 파견은 포위망에 갇혀 포로가 될 병력만 늘리는 꼴이었다.
영국군 사령관 고트는 남쪽 측면의 칼레와 불로뉴를 희생하여 독일군 탱크들이 해안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저지시킨 뒤 경계선을 설정했다. 계속해서 옥죄어오는 이 경계선 뒤로 영국 해군은 프랑스군과 함께 덩케르크 항구와 인근 해안으로부터 철수할 수 있었다. 독일 공군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으면서도 철수하는 군대나 이들을 나르는 선박은 거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지만, 5월 28일부터 6월 4일까지 계속된 다이나모 작전은 성공리에 33만 8,000명의 병사를 잉글랜드로 철수시켰다. 그중에는 12만 명의 프랑스 병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시점에서 연합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이는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탈출작전이었다.
이 당시 영국 원정군을 구한 또 하나의 영웅 버트럼 램지 부제독이 대규모 철수 작전 지휘를 맡았다. 그는 사령부가 있던 도버성의 방 이름을 따라 다이나모 작전이라고 명명했다. 각 지역에 흩어진 전투함을 모으는 일부터 시작했다. 개인 소유의 선박도 긁어모아 수용하거나 지원받았다. 징발하거나 지원받은 소형선박 약 700척이 투입됐다. 민간함대 또는 모기함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덩케르크 후퇴작전은 처절한 결말로 끝났을 것이다. 이들의 희생과 용기를 기려 현재까지도 5년마다 모기함대가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덩케르크까지 기념 항해를 한다. 영화 ‘덩케르크’는 2차 세계대전 초기 막강한 독일군의 진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연합군의 후퇴작전을 놀랄 만한 현장고증으로 당시의 경험을 훌륭하게 되살리고 있다.
[성기노 기자(kino@boannews.com)]
<저작권자: 보안뉴스(www.boa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