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보안] 자꾸만 마을 택배함에 방치되는 나의 물건들

2024-12-2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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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어야 하는 수취인 란에 이상한 이름들이...소소한 보안 습관이 만들어낸 해프닝들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요즘 아버지가 홈쇼핑에 맛을 들이셨다. 필요에 의해서다. 막내 손자가 아픈 바람에 며느리가 병원에 같이 입원해 있고, 당신 보시기에 집안 일이라고는 조금도 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탐탁치 않은 아들이 혼자서 집에 남아 직장 일도 하면서 사랑하는 손자와 손녀를 먹이고 입힌다는 게 어르신 생각으로는 쉬이 상상이 가지 않으시는 듯하다. 아들이지만 차라리 손주들을 붙들고 있는 인질범 정도로 여기고 계시리라. 그렇다고 본인이 먼 거리를 직접 와서 집안 일을 돕는다거나 손주들 돌보미를 하실 자신은 없으시니 주구장창 반찬과 간식거리를 사다가 보내신다.


[이미지 = gettyimagesbank]

처음에는 시장에서 발견한 것들을 띄엄띄엄 싸서 보내시던 분이 어느 날 TV만 틀면 온갖 상품들을 편리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배워버리셨다. 문자에 답도 잘 못하시고 카톡은 아예 하지도 않으시는 분이 최첨단(보다는 약간 아래급이긴 하지만) 쇼핑 기술을 터득한 뒤로 당당해지셨다. 매일 서너 번씩 전화를 거신다. 막내는 어떻냐, 다른 아이들은 공부 잘 하고 있냐, 추운데 옷은 있냐로 시작하는 통화는 거의 반드시 ‘저녁에 택배 오니까 다른 데 가지 말고 제 때 받아라’로 끝난다. 시장에서 배송할 물건을 고를 땐 유통 과정 중에도 안전히 버틸 수 있는 마른 반찬을 선호하셨는데, 최첨단 기술을 등에 업은 그는 이제 쉬이 썩는 것들도 과감히 보내신다. 대신 제 때 못 받으면 상할 까봐 물건이 냉장고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려드릴 때까지 계속 전화를 하시는 게 함정이지만.

우리 마을은 시골 산 중턱에 있어 택배 기사님들이 굳이 산을 다 오르지 않으셔도 되도록 마을 입구에 택배함을 따로 마련해두고 있다. 상하는 음식이 택배로 왔는데 받는 사람이 그걸 모르더라도, 마을 주민 중 누군가 택배함을 지나칠 일이 있으면 가져다주는 편이라 배달되는 물품이 잘못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나의 물건은 이따금씩 택배함에 그대로 방치된다. 집안 일 못하는 무능하고 탐탁지 않은 아들이라 마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건 아니고, 아버지의 의외로 철저한 보안 정신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안 정신 때문에 그렇게 택배를 보낸 후부터 냉장고 안착 시점까지 전화로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절대로 택배를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을 실명으로 적지 않으신다. 아들이 보안뉴스 기자라서가 아니다. 소포에 붙어 있는 실명과 실제 주소가 개인정보이며, 이게 악의를 가진 사람에게 노출될 경우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건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보안뉴스 기자이면서도 나는 아버지에게 이걸 가르쳐드린 적은 없다. 아버지가 홈쇼핑과 택배를 즐겨 사용하실 날이 올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정보’니, ‘정보 유출’이니, ‘그런 정보를 통해 실시하는 범죄’와 같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 국민 전화번호가 실린 책이 거리 여기 저기에 버젓이 놓여있던 시대를 지나신 분 아니신가.

하지만 불가능이라 여겼던 ‘어르신 상대 보안 교육’을 누군가 꼼꼼하게도 해냈던 모양이다. 택배함에 방치된 내 물건들에는 ‘문가용’이 아니라 ‘김구용’이라든가 ‘문하영’, ‘박용가’와 같은 가상의 이름들이 늘 붙어있다.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마을 주민들은 수취인이 가상 인물이라는 걸 모를 수밖에. 주민들 입장에서는 마을에 없는 사람 앞으로 온 택배일 뿐인 그것은 그렇게 택배함에서 방치된다. 나는 아버지 전화 독촉을 받고 마을 입구로 내려가 택배를 찾는데, 전화를 받고 간 입장에서도 그 가상의 이름 때문에 헷갈릴 때가 많다. 비슷하게라도 적어놓으시지...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됐다. 택배함을 오며 가며 마을 주민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름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 가져가는 택배, 그 집 거였어요? 아까 보니까 이름이 이상해서 안 가지고 갔는데, 라고 말을 건네면 뭐라고 설명할 말을 딱히 찾지 못해 ‘아, 네’하고 끝내기도 했지만 그런 일조차 반복되니 설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개인정보라 아버지가 조심하시나봐요, 이름이 올 때마다 달라지네요, 라고 말하면 다들 아버지 대단하시다고 치켜세운다. 당사자의 아들 앞에서 누군들 ‘참 까다롭고 피곤하게 사시네’라고 말하겠냐만은, 어느 새 마을 주민들은 아버지의 남다른 보안 정신에 대해 다 알게 됐다. 그러면서 원래는 방치되었어야 할 우리집 택배가 우리 집 문앞에 잘 도착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택배를 기회가 될 때마다 가져다주는 선량한 주민들이고, 개인정보를 보호한다는 개념도 이해하고 있으며, 그걸 집요하게 실천하는 우리 아버지 같은 실제 사례를 주기적으로 접하면서도 스스로 가상의 이름을 활용하는 흉내라도 내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더 재미있는 건, 입장이 바뀌었을 때의 나라도 누군가 택배를 가명으로 주문한다고 해서 그걸 따라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물론 가명으로 주문하는 게 확고한 보안 실천 사항은 아닌데, 그래서일까? 아니면 가명으로 했을 때 확실히 느껴지는 안전에의 경험이 없어서일까?

이유야 무엇이든 보안이라는 게 물리 공간에서나 가상 공간에서나 전염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율적으로 보안을 강화하게 한다’는 식의 접근은 번번이 실패하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 한두 사람 자율적으로 각종 보안 강화 조치를 실천하거나 도입할 수는 있겠지만, 이 보안이라는 것이 전염성을 단 1g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늘 그 한두 사람에서 끝난다. 보안을 전염병처럼 퍼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아버지의 인식 속에 ‘실명 금지’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그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한 것일까? 하지만 아버지는 ‘그 당연한 상식을 누가 꼭 알려줘야 아냐’고만 답하실 뿐이다. 정말 그렇던가, 아니면 선생을 잊으신 모양이다.

아마 보안이라는 게 전염성 있게 퍼지는 일은 가까운 미래에는 없을 것이다. 없던 특성이 갑작스럽게 생겨나지는 않을 테니까. 보안은 강제성 있는 규정으로 퍼트리는 게 가장 현실적이다. 반복학습을 통해 보안 실천사항이 ‘당연한 상식’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도 효과 면에서는 뛰어나다. 그리고 그 둘을 동시에 실시함으로써 없던 전염성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부여하는 것이 보안 확산의 유일한 답이리라, 오늘도 무사히 도착한 택배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자발적인 보안, 재미있는 보안, 저절로 퍼지는 보안이라는 것에 대한 미련이 한 꺼풀 벗겨지고 있다. 꼭 재미있어야만 할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마음이 동해야 배워지는 건 아니다. 한 어르신이 홈쇼핑을 안전하게 사용하게 된 것처럼, 필요가 들이닥쳤을 때 하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저작권자: 보안뉴스(www.boa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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