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연해야만 하는’ 정보보안, 어쩌면 벤치마킹 필요할 수도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물처럼 바람처럼, 우리 주위에 너무 많아서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사랑처럼 미움처럼, 우리 주위에 너무 많아서 알아채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그래픽 디자인이다. 각종 업체들의 간판부터 영화 포스터에 책 표지, 사진을 천성적으로 못 찍는 기자가 어쩌다 사진기를 잡게 되면 찾아 헤매는 A란 글자부터 소비자들이 그렇게나 질색해도 없어질 줄 모르는 핸드폰 뒷면의 통신사 마크가 전부 그래픽 디자인이다.
▲ 알고 보면 우린 그래픽에 포위되어 살아간다.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나이키의 그 화난 눈썹 모양의 로고도, 세계 모든 플레이어의 재생, 되감기, 잠시 멈춤, 정지 기호도 그래픽 디자인의 결과물이며, 보고서 쓸 때 내용물보다 더 심각하게 고민된다고 하는 각종 글꼴과 크기도 그래픽 디자인의 영역에 속한다. 지금 ‘아, 이 기사 그만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알트탭을 눌렀을 때 보이는 각종 아이콘들 역시 그래픽 디자인이고, 그 화면 전환 기능이 구현되는 방식 자체(인터페이스)도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고민하는 영역이다.
큰 기업들은 이런 그래픽 디자인을 자기 고유의 아이덴티티 형성에 영리하게 사용한다. 빨강과 주황색을 보면 SK가 떠오르고, 네모난 마름모 글꼴을 보면 현대카드가 떠오르는 게 다 그래픽 디자인이 우리 뇌에 한 짓이다. 여기서 잠깐 수수께끼 : 검고 딱딱한 모양의 ‘안’이란 글자에 빨간 세모가 11시 방향에 박혀 있다면? 보안뉴스...
즉, 이 웹사이트 제일 상단 화면을 비롯해 우리가 눈 돌리는 어디에나 그래픽 디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디자인 비용은 점점 낮아지고 있고, 평균의 디자이너들은 꽤나 박봉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필요보다 존재감에 더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이고, 만연한 그래픽 디자인은 존재감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그래픽 디자인 업계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고 있을까? 누구나 참여하는 보안 문화가 정착했을 때, 그래서 상대적으로 재화 가치가 낮아질지 모르는 보안 업계가 미리 봐둘 만한 것을 다뤄보고자 한다.
1. 회사 규모 축소
뛰어난 디자인 스튜디오들 중 10~20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소규모 스튜디오들이 많다. 해외에는 2~3명으로 십수 년을 운영해온 유서 깊은 스튜디오들도 많고,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하는 원맨 스튜디오도 꽤나 많은 편이다. 프리랜서와는 조금은 다른 개념으로, 원맨 스튜디오라도 정식 회사의 개념으로 일을 진행한다.
대신 이들은 파트너십이란 걸 적극 활용한다. 2명으로 구성된 A란 스튜디오가 커다란 프로젝트를 수주 받으면 3명이 모인 B란 스튜디오에 연락을 해서 공동으로 일을 진행한다거나, 평소 알고 지낸 프리랜서들 중 적임자를 찾아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함께 일을 하는 식이다. 이는 같은 업종의 사람들끼리 평소 교류가 잦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규모를 자유자재로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 보니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주 받고 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규모의 안정감을 버린 대신 소규모의 유연성 혹은 융통성을 얻은 것. 게다가 최소 인원이 참여되니 개개인이 가져가는 소득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우리끼리’ 일 하다 보니 일이 더 재미있어지는 건 덤이라고 한다.
2. Multidisciplinary
위 내용처럼 회사 규모를 축소하고 유연하게 움직이려면 동료들과의 교류도 필요하지만 개개인의 ‘다양한 실력’ 또한 필수 전제조건이 된다. 즉,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줄 알아야 살아남기 유리하게 환경이 변해간다는 건데, 실제로 요즘 대부분 디자이너들은 ‘그래픽 디자인’이란 광범위한 영역을 다 다룰 줄 안다.
즉, 로고도 만들 줄 알고, 웹 사이트도 만들 줄 알며, 책 편집이나 브로슈어 제작도 할 줄 안다. 개인이 이걸 다 못하면 최소 ‘스튜디오’ 단위에서는 다 커버가 가능하도록 인원을 구성한다. 종이를 다루던 디자이너가 고집스럽게 종이만 다루는 식의 ‘장인정신’은 점점 줄어가는 게 그래픽 디자인 시장의 현 주소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웹 디자이너가 편집 디자인을 배우는 것보다 편집 디자이너가 웹 디자인을 배우는 경우가 더 많다.
3. 단골관리의 묘미
아무리 교류를 잘 하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도 덩치들이 난무하는 시장 상황에서 소규모 디자이너 단체가 살아남기란 녹록치 않다. 오랜 기간 살아남는 디자이너들을 두고 ‘역시 뛰어난 창의력은 자본을 이긴다’는 식으로 포장하기도 하는데,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클라이언트와의 유대 관계’가 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오래 살아남는 디자이너들은 기본 실력은 물론이오, 단골손님 유지하는 법을 체득하고 있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는 소위 말하는 ‘서비스 마인드’보다 좀 더 깊은 곳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기가 만드는 창작물들이 ‘예술품’이 아니라 클라이언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걸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단골이 많은 디자이너들은 ‘감히 내 예술품을 무지한 클라이언트 따위가 지적하다니!’가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의 문제를 잘못 인식하고 있나?’, ‘내가 못 보는 뭔가가 있나?’를 생각한다고 한다. ‘내 미적 감각을 보거라!’가 아니라 ‘문제가 정말 해결되고 있는가?’가 더 재미있는 고민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클라이언트와 싸우기도 많이 한다. 하지만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문제 해결’이라는 공통의 주제가 중심을 잡고 있으니 이 싸움조차도 생산적으로 변한다는 게 단골 유지 잘 하는 디자이너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물론 그래도 싸움은 피하는 게 최선이긴 하다.
4. 실적 관리 철저
이건 어쩌면 보안 업계가 가장 닮기 힘든 부분일 수도 있다. 그래픽 디자인은 결과물이 눈에 매우 잘 띄고, 눈을 위한 것이 많지만 정보보안은 눈에 안 띄고, 아무런 일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디자이너들은 ‘눈에 보이기 위한’ 노력을 다른 산업에 비해 유난히 더 많이 기울이기도 한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디자이너들은 ‘포트폴리오’라는 걸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보유하고 있으며, 자기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작업물들을 10~20개 정도 목록화시킨다. 이 포트폴리오를 위해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는가 하면, SNS도 이를 목적으로 운영한다. 더 극성인 부류는 정기적으로 인쇄까지 해서 언제고 누가 물어보면 가져갈 수 있게 ‘대기만성’ 상태를 유지한다.
보안이 가장 못하는 부분이 이것이다. 위에서 말한 본질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눈에 안 띄는 분야’라고 넋 놓고 있는 건 아닐까. 정말 보안의 실적을 보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는 보안 업계 전체가 해야 할 고민이기도 하다. 말했다시피 우리는 ‘중요도’보다 ‘존재감’에 더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5. 이미 범죄자들은 적용 중
궁금증이 들 수 있다. 보안업체가 규모를 축소하는 게 가능할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안의 여러 영역을 다룰 줄 알고, 필요하다면 두세 명씩 뭉쳐 침투 테스트를 하거나, 멀웨어를 분석하고, 보고서를 써서 발표하는 등 보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채로운 노력들을 유연하게 하는 게 가능할까? 한 분야 알기도 어려운데 여러 분야를 섭렵하는 게 말이 되나? 문제 해결이라는 본질에 진지하게 임할 수 있을까? 어떤 실적을 앞세워야 내가 한 보안업무가 눈에 띌까? 그런 게 있긴 할까? 등등
부정이나 긍정이나, 확언은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건 보안전문가와 기능적으로는 가장 닮았다는 해킹 범죄자들이 이미 이런 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규모 범죄 집단도 존재하지만 기능별로 뭉쳤다가 흩어지면서 감시망도 피하고, 또 유연하고 다양하게 범죄 사업을 운영하는 방식도 일부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 참조)
자꾸만 범죄자들에게 지기만 하니 이대로는 안 된다,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어쩌면 변해야 하는 건 산업 구조 자체는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의 B2B 위주의 ‘덩치 큰’ 정보보안은 유연하게 공격해오는 해커들을 애초에 못 막을 형태일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보안은 덩치를 불려야 하는 게 아니라 만연해야 한다.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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