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보안] 테이프 늘어져라 음악을 듣던 때가 가끔 그리운 이유

2024-12-14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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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곡을 편리하게 골라 들을 수 있는 지금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카세트 테이프 빌려주고 빌려가며 음악을 듣던 시절, 나에게는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 바로 빨리감기나 되감기를 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를 자주 하면 테이프가 늘어나 음역이 점점 낮아지고 소리는 굵어지는, 달갑지 않은 청취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거리낌 없이 그 두 개의 버튼을 누를 수 있었던 건 나이 차 제법 나는 형이나 누나가 있어 앨범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던 녀석들뿐이었다.


[이미지=gettyimagesbank]

그러다 보니 듣기의 단위가 ‘곡’이 아니라 ‘앨범’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이라 하더라도 모든 곡이 다 좋을 수는 없었는데, 그런 곡들도 다음에 나올 애창곡을 위해 꾹꾹 들어두어야 했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면 좋아하는 곡을 외우는 건 물론 앨범 내 노래 순서까지 외우게 되었고, 처음에는 귀에 안 들어오던 곡들이더라도 점차 좋아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어떤 경우는 곡을 이렇게 저렇게 배치한 가수의 마음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었고, 나 같았으면 타이틀곡을 이걸로 하고, 이 곡을 다음에 넣고, 하는 식으로 상상 프로듀싱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CD가 나왔다. 혁신이었다. 내 안에 잠재되어 있었던 빨리감기와 되감기의 욕망이 한없이 분출되었다. 영화음악 앨범에서는 Gabriel┖s Oboe만 몇 시간이고 들을 수 있었고, 셀린 디옹의 93년 앨범에서는 Power of Love만, 다음 해 나온 본조비의 앨범에서는 Always만 잠들 때까지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아무리 골라 들어도 늘어날 걱정이 없다는 건, 뭐랄까, 치약을 중간에서부터 짜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는 세상에 들어선 것 같은 어마어마한 자유를 선사했다.

하지만 같은 영화음악 앨범에 Dying Young이라는 또 다른 명곡이 있었다는 것을 수개월 후에나 발견할 수 있었다. 셀린 디옹의 Only One Road도, 본조비의 Someday I┖ll be Saturday Night이 귀에 꽂힌 것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첫인상 좋은 음악만 주구장창 듣게 되고, 좀 여러 번 들어야 좋아지는 곡들에 전혀 기회가 가지 않다보니 어느 순간 아예 새로운 음악을 접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 좋았던 곡들과 앨범을 찾아 계속 들었고,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지금까지도 90년대 후반에 멈춰 있다.

CD의 시대가 끝나고, MP3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 때가 되었다. 경쟁 때문인지 제조사들은 이런 기기들에 영어사전도 하나씩 넣어 주었다. 어렸을 때 부의 상징이었던 전자사전이라는 것이 누구나의 주머니에 하나씩 보관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검색엔진이나 챗봇만 이용해도 편리하게 사전을 대체할 수 있게 된다. 단어 입력만 하면 원하는 정보가 툭툭 튀어나오는 편리함은, 그러나 영어 학습자의 어휘력을 심각하게 퇴보시켰다. 원하는 단어의 뜻을 찾으려고 종이로 된 사전을 뒤적이면서 자기도 모르게 보게 되는 단어들이 무의식 속에 박히는 걸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편리하게 전자사전을 찾으면서 원서들을 읽어도 도무지 늘어나지 않는 어휘력을 고민하다가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편리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편리의 이면에 큰 누수가 생기고 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중국에서는 꽤나 오래 전부터 타이핑에 익숙한 세대들이 자국어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게 사회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정보보안 분야에도 신기술이나 솔루션 한두 개에 너무 의존하면서 안전할 거라고 무작정 믿는 것에서부터 보안 구멍이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개념이 존재한다.

인공지능 기술이라는 것을 공격자들도 활용하기 시작할 거라는 경고가 나왔을 때, 개인적으로는 기대되는 바가 있었다. 기술의 편리 속에 공격자들의 날카로움이 무뎌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최근 언젠가 1티어로 분류되는 사이버 범죄 단체들의 경우, 아직 수작업으로 공격하는 걸 즐겨한다는 연구 보고서가 나오면서 이 희망은 식었다. 단련을 위해 일부러 불편한 ‘수동’ 기술로 회귀했다기보다 기술적 한계로 인해 그런 것이었겠지만 ‘뭔가를 진짜 알고 있는 놈들’ 같아 소름이 살짝 돋았었다.

누릴 수 있는 걸 빠르게 받아들여 누리는 사람들, 즉 얼리어답터들은 사실 그리 무섭지 않다. 오히려 그걸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함부로 할 수 없는 비범함이 느껴진다. 중독과 관련된 책 ‘이레지스터블(Irresistable)’에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자녀들이 아이패드를 마음껏 만지지 못하게 했다는 내용과 블로거와 트위터의 창립자인 에반 윌리엄즈(Evan Williams) 역시 직원들에게는 아이패드를 전부 나눠주면서 아이들한테는 아무 기계도 사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할리우드 스타들 중에서도 자녀들의 TV 및 영화 시청을 제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알려져 있다.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아이들과 자전거를 매일 저녁 타고 다니는 필자 동네의 아저씨 한 분은, 집 앞 차도가 일방통행이라 매번 집을 크게 한 바퀴 돌아서 들어간다. 차라고는 거의 다니지 않는 시골길인데도, 아이들에게 규칙 어기는 걸 가르쳐주기 싫다며 우직하게 그 일방통행을 지키시는 것이다. 이런 분에게는 작은 물건 하나 빌려도 진심으로 내 것처럼 아껴 쓰다 돌려드리게 된다.

우리 아이들의 컴퓨터 선생님은 “컴퓨터는 도구일 뿐”이라는 걸 강조하며 ‘자판을 종이에 그려서 연습하기’와 ‘마우스 패드를 헌옷으로 만들기’, ‘수업 끝나고 장비를 정돈하는 법’부터 학과를 시작하는데, 이 수업 시간만 되면 학부모인 내가 더 긴장한다. 혹여 내가 아이들 앞에서 매일 컴퓨터를 사용하는 와중에 이 선생님의 수업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혼란을 야기하지는 않았는지 되짚어 보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든 보안의 결론은 대동소이하다. 솔라윈즈 사태가 벌어져도, 익스체인지 사태로 미국 정부기관이 나서서 경고를 발표해도, 결국 ‘기본적인 보안 수칙만 잘 지켰어도 막을 수 있었을 공격’으로 귀결된다. 기본만 지켰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거다. 마치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성경 읽고 기도하라는 결론만 매주 얻는 것과 비슷하다. 혹자는 이를 지겹다거나 현존 보안 기술과 이론의 한계라고 평하기도 하는데, 정말 그럴까? 보안이라는 건 의외로 가까운 곳에, 단순한 형태로 존재한다.

보안에 신기술이라는 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보안을 편리하고 강력하게, 자동으로 해결해 준다는 기술이 등장한다는 소식에 해커들이 긴장할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누군가는 호기심이나 공포심을 못 이겨 가짜 링크를 클릭할 것이고, 어차피 누군가는 쇼핑몰 계정이든, 은행 계정이든, 메일 계정이든, 123456이나 1q2w3e로 비밀번호를 설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패치가 부담스러워 미루는 조직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런 불변의 진리가 있어 공격자들은 그 어떤 보안 신기술에도 그리 위협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용자들이 더 이상 이런 기본적인 허술함을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단순 피싱이나 사회 공학적 공격이 통하지 않을 때, 밥줄이 끊어지는 위협을 느낄 것이다.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저작권자: 보안뉴스(www.boa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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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정(uskawjdu) 2024.12.16 10:41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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