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영화] 힘과 책임을 동일선상에 놓았어야 했던 ‘스파이더맨’ 시리즈

2024-07-12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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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유명한 대사...하지만 이 말이 맞는 말일까?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보안 분야 칼럼이나 기사에서 영화가 인용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불과 한 움큼 글에서 인용되는 장면이나 대사더라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정확한 통계를 내본 건 아니지만 지난 10년 보안뉴스 국제부 기자로서 보안 전문가들의 수많은 칼럼들을 번역하고 편집하면서 가장 많이 접한 영화 대사는 <스파이더맨 1>의 그 유명한 “커다란 힘에는 커다란 책임이 따른다”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네이버 영화]

커다란 힘과 커다란 책임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건 매우 정의로워 보인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래서 모두가 이견을 갖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많은 이들이 부담없이 인용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힘을 가진 사람이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경우를 찾는 게 그리 쉽지 않은 세상이다. 스파이더맨조차 2편에서 영웅을 그만두기로 해놓고 잠시나마 쾌적하고 자유롭게 일상을 회복하기도 했다. 왜 힘이란 게 책임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지 않는 걸까? 양심의 문제일까? 그런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스파이더맨 시리즈라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내용만을 살피도록 하자.

스파이더맨의 경우 커다란 힘을 ‘우연히’ 갖게 됐다. 또한 ‘한 번에’ 가지기도 했다. 거미의 능력을 소원한 적도 없고, 그 능력의 발현을 위해 신체 단련을 꾸준히 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진 큰 힘이란, 과학 분야에서 보이는 우등생의 재능이었다. 거기에다가 사진 찍는 취미 정도 가진 게 다였다. 아무런 맥락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기한 능력을 ‘공익을 위한 책임’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능력이니, 그가 손에서 거미줄이 나가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단박에 뉴욕 시민들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능력에 비례하는 책임감이라는 것은 능력이 서서히 자라남에 따라 같이 자라는 게 일반적이다. 선생님이 되기 위한 여러 교육과 실습 과정을 거치면서 교육자로서의 책임이 서서히 싹트는 게 보통이지, 유독 남에게 잘 가르치는 탁월한 재능을 발견한다고 해서 교사로서의 책임을 느끼는 건 아니다. 아무리 아이들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결혼을 하고 가정이라는 걸 천천히 꾸려가면서 부모로서의 책임감이 점점 굳건해져 가는 것이지, 자신의 생식 능력을 깨닫고서부터 참 부모가 되고 싶은 열망이 생기는 건 아니다. 거미에 물려 한 번에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영화 속 설정은 그렇다쳐도, 그것으로 인해 갑자기 숭고한 공익 추구자가 된다는 건 아무리 상상 속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서도 무리다.

그렇기에 <스파이더맨 1>의 작가는 책임감에 대한 계기를 주인공에게 심어주기 위해 삼촌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삽입한다. 삼촌은 결국 책임감을 가지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떠나며, 그 때부터 스파이더맨은 뉴욕의 범죄자들을 처단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삼촌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 큰 힘에 따른 책임감 때문에 한 것이 아니었다. 삼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거기에 약간의 복수심이 가미되었다.

어떤 책임감은 이처럼 다른 감정의 ‘가면’이 되기도 한다. 스파이더맨의 경우, 책임감이라고 보였던 행동들 저 밑바닥에는 죄책감이 있었다. 이런 경우가 많다. 잘 알려진 도시 전설도 좋은 사례다. 애 보기 싫어 집에 가지 않고 12시까지 야근을 한다는, 어느 회사에나 있을 것 같은 과장님들이나 부장님들 이야기 말이다. 이들은 늦게까지 일하며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이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도시 전설’처럼 이야기로만 남아있어 실존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렇게 감정들이 겹치며 가면을 쓰기 시작하면 감정의 주인들도 속는다. 나는 정말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한 줄 알았는데, 뒤에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걸 천천히, 그리고 아프게 깨달을 때가 많다. <스파이더맨 2>가 바로 그 이야기다. 죄책감을 책임감인 줄로만 알고 범죄 소탕에 힘썼지만 스파이더맨은 오히려 더 지쳐만 간다. 하는 일마다 꼬이는 것 같고, 심지어 스파이더맨의 트레이드마크인 거미줄도 잘 발사되지 않는다. 몇 번의 추락 끝에 그는 정의를 집행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하고 한 시름 가벼워진 삶을 살게 된다.

책임감은 의외로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기 힘들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내 딴에는 책임감으로 열심히 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중독이었다(예 : 워커홀릭). 혹은 뭔가 다른 쪽에서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예 : 위에 언급한 도시 전설 속 아버지들). 혹은 게으름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예 : 부서 전체가 몸 쓰는 일에 동원될 때마다 번번이 고객과 깊은 대화를 시작하는 직원). 책임감이라는 게 워낙 보편적으로 찬사를 받는 것이기에 가면으로 사용하기에 알맞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책임감 가면’ 쓰는 일에 능숙해져 있다. 가짜가 난무하면 진짜의 가치는 더 올라가는 법이고, 그렇기에 진짜 책임감은 돋보이기도 하고, 희귀해지기도 한다.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왜 우리는 자기가 가진 힘을 책임감 있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없을까?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리고 스파이더맨 영화에 빗대어 보자면, 그것은 능력과 책임감이 같이 자라나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 중 뭔가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즉 책임감은 잘 가르치지 않고, 능력 발휘와 누림에만 치우쳐 있는 교육 과정 속에서 각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이 배양되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이 사회에 많다는 건, 그 사회가 가진 교육 시스템 전반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된다. 그것이 세계적인 문제라면, 이 시대를 지배하는 생각의 기조 자체가 잘못됐다는 걸 말한다.

능력의 성장과 함께 책임감의 부피가 커진다는 걸 자연스럽게 습득하지 못한 사람은, 가짜 책임감과 진짜 책임감을 구분하기 힘들다. 그러니 엉뚱한 곳에 열심을 내고 책임을 다하다가 진짜 필요한 곳에서 구멍을 내고, 그러면서 ‘왜 나는 열심히 했는데 되는 게 없냐’며 세상을 원망하고 불만을 품는다. 도시 전설 속 아버지들이 회사가 시키지도 않은 야근을 하며 업무 책임을 다하는 대신 아이 보는 어려움을 직면하고 가정의 책임을 다했다면, 나중에 가족들과 소원해진 채 ‘아빠는 돈 버는 기계일 뿐이구나’라고 한탄하는 일이 없지 않을까.

‘정보 보안’도 꽤나 ‘책임’이 무거운 분야 중 하나다. ‘책임’이라는 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취약점을 제보하는 것도 책임감 있게 해야 하고, 대 IT 시대에 해킹이라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책임감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기업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살인적인 업무량도 당연하게 여겨야 하고, 사고가 터지면 보안 담당자들이 제일 먼저 책임을 진다. 말 그대로 ‘책임’의 분야다. 책임을 짐으로 인지한다면, 사람이 모자란 게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필자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스파이더맨 1>의 대사가 보안 분야에서는 인용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큰 힘을 발휘하고 싶어? 그럼 책임부터 생각해야지’라는 말과 같기에, 결국 책임이라는 것을 짐처럼 여기게 만드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 책임의 무게감에 눌려 스파이더맨은 시리즈 내내 자신과의 싸움을 처절하게 진행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초강력 빌런들은 그의 내적 고민에 비하면 한없이 약해 보일 정도다. 큰 힘에 짐처럼 따라붙는 게 책임이 아니라, 책임 그 자체가 큰 힘이다. 책임을 져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 곧 힘을 가졌음을 의미하고, 책임감을 배양한다는 것이 곧 힘을 기르는 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책임과 힘은 사실 동일한 말이다.

보안 전문가의 힘이라고 했을 때 흔히들 떠올리는 건 해킹 능력이다. 컴퓨터 좀 잘 다루고, 현란한 신기술에 대해 해박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이다. 그런 기술들 위에 서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남들이 발견할 수 없는 약점과 허점들을 기가막히게 파악해 뚫고 들어가 위험도를 측량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온 사방에 IT 기술이 즐비한 때에 보안 전문가들이 가진 이런 능력은 스파이더맨의 그것보다 더 강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안 전문가들의 진짜 능력은 따로 있다. 끝없이 ‘책임’이 요구되고 언급되는 환경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책임감 있는 계획과 동선을 짜는 것에 익숙하며, 그러므로 자신들의 능력을 함부로 발휘하지 않는다. 당연히 아닌 사람들도 있다. 다크웹 해킹 포럼에 가면 같은 해킹 능력을 가지긴 했지만 책임감이라는 진짜 힘을 가지지 못한, 보안 전문가일 수 있었지만 책임이라는 능력이 결여되어 실패한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이 양지에서 보안 전문가로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책임이라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책임에 익숙하고, 그러므로 진짜와 가짜 책임감을 구분할 확률도 높다. 책임을 올바른 방향으로 해석해 질 줄 아는 것, 요즘처럼 신기술 난립으로 규범이나 표준이 미처 정립되지 않은 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때에 진귀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책임을 다하는 게 어려운 건, 그것이 짐짝처럼 무겁고 버거워서가 아니라 큰 힘이기 때문이다. 힘을 가진 자라고 해서 힘을 발휘하는 게 늘 쉽고 간편한 건 아니다. 힘이 있건 없건, 힘을 내야 할 때는 신음을 내고, 근육이 터져라 힘을 주고, 정신을 집중시키고, 땀이 송글송글 맺도록 해야 하는 건 매한가지다. 다만 그 결과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책임감은 슈퍼파워 난무하는 공상의 영화 시나리오에서조차 한 번에 생겨나는 것으로 설정할 수 없는, 진정한 슈퍼파워다.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저작권자: 보안뉴스(www.boa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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