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영화] 개인정보의 가치를 보여주는 ‘페르시아어 수업’

2024-01-1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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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수감자들의 개인정보로 언어를 만들어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이름은 위대하다. ‘개똥이’라는 이름에조차 자식의 장수를 기원하는 가족의 사랑이 담겨져 있으며, 뿌리 깊은 사회의 구조와 당대의 시대상이 이름 한 줄로 표현되기도 하고, 이 언어에서 저 언어로 빠르게 전파되며 부드럽게 현지화 되기도 한다. 태에서 아이를 처음 발견한 예비 부모가 가장 처음 떠올리고 가장 고심하는 것도 이름이고, 그 아이의 인생이 수십 년 후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유일하게 지상에 남는 것도 이름이다. 인터넷의 저 어두운 구석에서 쉴 새 없이 거래되는 물건들 중에도 이름이 있다.


[이미지=네이버영화]

이처럼 위대한 이름을 개인정보로 분류해 안전하게 보관하려는 움직임이 계속해서 강화되고 또 전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지금에서야 이렇게 부산을 떠는 것이 늦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강제수용소에 갇혀 버린 유태인 ‘질’에게 있어 개인정보에 대한 일반인들의 경각심이 그리 높지 않았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남의 이름을 꾸준히 도용하고 활용한 덕분에 목숨을 건져 결국 구조될 수 있었는데, 그는 훗날 이러한 자신의 빚을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과 ‘증언’으로 갚는다. 실화는 아니고,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의 이야기다.

영화 속 주인공은 스스로를 유태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인이라고 속이면서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된다. 강제수용소 관리자 중에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관리자는 주인공에게 페르시아어를 가르쳐주면 죽이지도 않을 뿐더러 편안한 일을 주겠다고 약속하는데,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기에 주인공은 여기에 일단 응하고 본다. 그리고 자기가 말을 만들어 페르시아어라고 속이며 과외를 시작한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한 언어를 통째로 만들 수는 없다. 된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린다. 절박한 상황이긴 했지만 주인공이 하룻밤만에 수많은 어휘를 창조해 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민하던 그 앞에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의 명단이 나타나고, 그는 그 명단에 나온 이름들을 부분부분 발췌하고 조합해 단어들을 만들어낸다. 명단에 나온 이름들의 수만큼 그의 날들이 연장됐다.

우여곡절이 있긴 하지만(그러니 영화가 진행된다) 그는 자신처럼 갇히고 죽어나가는 동족들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살며 목숨을 이어간다. 명단의 끝에 이르자 그는 수용소로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이름을 물어가며 머릿속에 저장하고, 그것을 다시 단어로 바꾸어 과외 수업을 진행한다. 이름을 남긴 그들은 죽고, 죽은 이름들의 수는 주인공이 더 살 수 있는 날로 전환된다. 그 이름들이 페르시아어인 줄로 철썩같이 믿고 있는 관리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언어를 말하며 나중에는 시까지 쓰기에 이른다. 사실은 그의 관리 아래 죽어간 유태인들의 이름을 읊고 있는 것이지만 그는 아무 것도 모른다.

죽어가는 사람의 이름 하나가 생존하려는 사람의 하루가 되고, 지긋지긋한 전쟁의 끝을 기다리며 미래를 개척하는 관리자의 내일이 된다는 이 설정은 개인정보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요즘은 개인정보가 중요하니 함부로 흘리고 다니면 안 된다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자기 이름 한 번 대고, 전화번호 알려주고, 주소지 밝히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비슷한 맥락에서 해킹 사고가 아무리 빈번하게 일어나도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방어 대책을 제대로 수립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살아가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여기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의외로 많은 경우 자신의 가치에 대한 폄하의 경향이 눈에 띈다. 저 먼 옛날 자아가 생겨나기도 전부터 늘상 접해 왔으며, 지금까지도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여 부르는 내 이름 석자를 또 다른 누군가 가져간다 한들 뭐 그리 대단한 일이 일어날까 싶기도 하고, 우리 회사처럼 작은 곳을 누가 해킹씩이나 해가며 공격할까 싶은 것이다. 일종의 겸손이나 겸허에서 출발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무책임하고 위험한 것에 더 가깝다. 아니, 겸손과 겸허라는 가면 아래 도사리고 있던 게으름이나 무책임이 요즘 같은 시대라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겸손한 언행과 겸허한 태도는 어느 사회에서나 환영받는 미덕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자랑으로 넘쳐나는 사람보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선호한다. 겸손은 배우기도 쉽다. 말 조금 줄이고, 칭찬을 사양하는 것만 익혀도 능숙한 ‘겸손러’가 될 수 있다. 여기에다가 남을 적극 칭찬하는 것만 곁들이면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고, 자신이 높아질 수 있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 높이면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겉모양의 흉내에만 그친다면, 겸손이라는 것은 오히려 자기 비하나 자책과 같은 것으로 변해 스스로를 겨누는 칼이 되어버린다. 실제로 우리는 남을 칭찬하기 위해 불편할 정도로 스스로를 비하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곤 한다. 예를 들어 ‘어쩌면 그렇게 잘 생겼어요. 나는 코도 이렇게 팍 눌렸고 얼굴도 커서 사람들이 쳐다도 안 보는데...’라고 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 가도 한 명씩 꼭 있다. 그런 사람이 칭찬해주는 말은 기분을 좋게 하는 게 아니라 묘한 씁쓸함을 남긴다.

게다가 겸손이 워낙 전 세계적으로 환영 받는 가치이기 때문에 이걸 포장지로 잘 활용하기만 하면 많은 것들을 감출 수도 있다. 팀이나 부서의 향방을 논하는 자리에서 과감히 의견을 제시하기 귀찮거나 두려울 때 우리는 ‘나 같은 사람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서...’라며 겸손을 가져다 쓴다. 꼭 짚어야 할 중요한 사안들이 있음에도 ‘나 때문에 회의 시간 길어질까봐...’라며 침묵을 지키며 겸손을 떤다. ‘나 같은 사람의 이름 따위’라고 하고, ‘우리 회사 같은 콧구멍 같은 곳’이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보안에 쏟을 시간과 노력과 돈이 아깝다거나 더 알기 귀찮다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선호하는 겸손의 원본은 어느 새 희박한 것이 되어버렸다. 아무나 갖지 못하는 진귀한 뭔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흉내 낸 겸손의 모조품들로 만족한다. 그 모조품을 입고 다니며, 모조품이라는 게 적나라하게 보여도 지적하지 않는다. 여태까지는 그래도 큰 문제가 없었다. 미숙해도 어쨌든 겸손하려 하는 것이니 넘어가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의 일이 실제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되면서 더는 넘어가 줄 수 없는 게 되고 있다. 겸손히 안전수칙을 무시하고, 겸손히 보안 강화에 게으른 게 빠르게 돌고 돌아 모두에게 피해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큰 가치를 느끼지 못한 내 이름이 사이버 공격자들을 배불리고, 그것이 더 강력한 후속 공격의 원천이 된다는 건 영화 속 설정이 아니다. 스스로를 작고 하찮게 보고 있는 소규모 회사가 공격자들에게 뚫려 더 큰 회사나 기관의 침해로까지 이어져 산업 전체나 지역 전체로까지 피해가 확산되는 건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공격을 허용한 사람들이 보안의 중요성을 몰라서 그런 걸까? 돈이 없어서 그런 걸까? 그것들도 요인이 될 수 있지만 더 직접적인 건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짜 겸손에 자기도 모르게 너무 익숙해져 왔다는 것이다. 영화도 아닌 실제 침해사고와 피해 소식이 아무리 전쟁을 알리는 북처럼 울려도, 계속 가짜로 겸손했던 우리는 뒤로 숨어들어가기만 한다. ‘이런 회사가 뭐...’ ‘나 같은 사람 이름이 뭐...’

보안을 통해 겸손의 원본을 복구시키고 새롭게 배워야 할 때다. 나를 숨기고, 더 나아가 비하하면서까지 낮아지는 흉내를 냄으로써 구사했던 겸손의 겉모습은 폐기처분하고 내게 주어진 역할을 다 하는 진짜 겸손의 방법을 익혀야 한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라고 한다. 겸허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태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남 존중은 나에게서 비롯된 나의 개인적인 피해가 이제는 남에게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아진 환경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낮추고, 비우는 건, ‘우리 같은 작은 회사는 공격자들이 공격하지 않는다’는 그 근거 없는 믿음과 희망을 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짜 겸손은 지금의 시대가 주는 리스크를 이해하고, 그것에 따라 내가 굳건이 고수해 왔던 생각을 전환시킬 수 있는 태도다.

잃었던 겸손의 원본, 보안이 찾아 시대상을 반영해 복원시켜야 한다.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저작권자: 보안뉴스(www.boa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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