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과 How를 섞으면 조금은 덜 극단적으로 반응하지 않을까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무심코 아내에게 아이 친구 엄마들 중 한 명이 막내 이모를 닮았다고 말했다. 그 말이 고스란히 전달된 모양이다. 실례였다. 다행히 웃고 넘어갔다 들었지만, 썩 기분이 나빴을 것도 같아 미안했다. 우리 또래가 말하는 ‘이모’들은, 실제 우리 막내 이모도 그렇지만, 아이들 대학까지 다 보내시고 은퇴를 바라보는 연배시기 때문이다. 나보다 어린 40대의 아기 엄마가 닮기에는 꽤나 예외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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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그분에게서 이모를 본 건, 예외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흔한 사람의 속성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 속성이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주관적 시차’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히, 엄격한 속도에 맞춰 흘러가는 것이지만 각자가 체감하는 것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고, 막내 이모는 지금에야 어르신에 속하는 분이지만 나의 눈에는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아가씨로 멈춰 계시다. 우리 어머니가 예뻐하셔서 어디나 데리고 다니시던, 거의 10년 터울 동생인 ‘꼬마’ 이모님을 보면 아직도 그 때 모습만 보일 뿐이다. 내가 닮았다고 하는 이모는, 80년대에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시며 결혼을 준비하시던 그 아가씨를 말한다.
장모님도 자매들과 친하시다. 그래서 처가에 가면 아내의 이모님들을 자주 뵙는다. 결혼을 앞두고 장모님께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도, 장모님은 이모님들의 호위를 받고 계셨다. 당연히 그 때 처음 본 분들이고, 따라서 여느 어르신의 모습으로 내 안에 각인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 막내 이모를 볼 때처럼 예전의 아가씨가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결혼 후 시간이 꽤나 흘렀고, 이모님들은 그 사이에 손자 손녀 두신 할머니들이 되셨지만, 아직도 나는 장모님을 호위하시던 그 때 그 분들을 만난다. 그 때로부터 더 나이가 드시지도, 그렇다고 젊어지시도 않으시는.
그들을 보다가 거울을 보면, 그 시차라는 것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게 재미있다. 세상에서 늙는 이, 오직 나뿐이다. 그 엄격한 시간이란 것이 가끔 이렇게 사람 감각에 장난치는 걸 볼 때마다 혼냄과 어룸, 차가움과 따듯함, 정의와 사랑이 세상 곳곳에 공존하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시간이 어머님을 엄격히 모시고 간 빈 자리에는 그 어머니의 예쁨을 받았던 막내 이모님이 아가씨의 모습으로 남아 계시고, 그 이모님마저 차례가 되어 떠나시면 난 아내의 친구분을 보며 실례되지 않는 선에서 이모님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도 나중에 60대, 70대의 나를 보고 30대, 40대의 젊은 부모가 문득문득 겹쳐 보이는 애틋한 혼란 속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성장을 생경하게 쳐다보는 날이 있을 것이다.
단호하면서도 배려 깊은 시간의 양면성은, 사람이 가진 그 특유의 극단성을 오래도 참아오고 있다. 한쪽으로만 쏠리는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이 우리에게 산적한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해줄 만병통치약처럼 이야기될 때, 우려를 조금만 표현해도 손가락질 했었다. 블록체인이 한창 뜰 때도 분홍빛 단어만 골라 쓰는 사람들이 주목 받았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 사회적으로 뭔가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 언론과 여론 모두 극단으로 갈라져서 싸운다. 날선 희망과 억센 절망이 시간 속에 품겨 몇 풀 꺾일 때까지, 우린 서로의 적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사안을 지날 때마다, 넉넉해질 수 없는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게 된다. 싸움을 붙여서 먹고 사는 일부 언론과 정계의 전략들이 가장 큰 지혜로 느껴질 정도로.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도 우리는 쉽게 극단으로 치닫는다. TV가 고장났어? 새로 사! 의자가 삐그덕거려? 버려! 고쳐서 쓰는 행위라는 것은 오래된 골목의 작은 전파상 주변에 도시 전설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내가 내 물건을 뜯어서 내부를 훤히 보고 원리를 이해하며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진정한 주인의식의 발로는 효율성 떨어지는 케케묵은 것이 되었다. 비슷한 물건을 언제고 구매할 자유만이 현대의 주인의식을 정의한다. 그러니 다른 문제에서도 우린 이렇게 말한다. 패치를 하지 않아? 안일하네! 비밀번호가 털렸어? 그러게 진작에 버리라니까! 최저임금이 너무 올라서 자영업자가 힘들어? 망해도 싸네! 탓하고, 버리고, 새로 사는 것으로 우리의 사고는 좁혀져 있다. 속속들이 알아가는 그 진득한 깊이에의 추구는 극단적인 효율성 추구에 밀려 노인 취급 받고 있다.
현재의 비밀번호로는 계정을 충분히 지킬 수 없다는 거, 보안 전문가라면 다 알고 있다. 패치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것도 반론이 없는 명제 중 하나다. What은 이미 결정되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 자체는 명확하다. 하지만 어떻게, 어떤 속도로, 어떤 길을 따라 가야 하는지는 좀처럼 얘기되지 않는다. 얘기가 되더라도 들리지 않는다. How가 빈 상태다. 비밀번호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기업들의 이유와 패치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보안 담당자들의 속사정은 거침없는 what 앞에 변명으로 전락할 뿐이다.
한창 클라우드로 가야 한다는 방향으로 모두가 치달았다가, ‘언클라우드’하는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클라우드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던 이들이 온프레미스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하이브리드나 사설 클라우드 등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그 실패담이 ‘클라우드를 클라우드 답게 활용하는 방법’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 클라우드 사용에 실패했던 이유들을 되짚어보면서 다시 클라우드로 돌아가는 건데, 그 이유 중 ‘보안’이 꽤 섞여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클라우드 보안의 how가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클라우드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극단적 여론 사이에서 부드럽게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느낌이다. 실패해본 자들의 목소리는 자주 간과되지만 사실은 소중한 것들일 때가 많다.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고, 그래서 잘 안 되긴 하지만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건 의외로 간단하다. What에 How를 곁들이는 것이다. ‘새로 사!’ 같은 홧김의 How 말고, 오래된 전파상 주인처럼 현상을 뜯어 그 속사정과 원리를 꿰어 가장 알맞은 부품을 찾아 새로 바꾸는 그런 How 말이다. 다행히 이는 일상에서도 연습이 가능하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차의 공간이 좁아질 때, 큰 차를 사기 전에 가방걸이나 바구니 같은 것들을 활용해 공간을 색다르게 활용해본다든지(다이소에 이런 물건들 많다), 오래돼 30분도 버티지 못하는 태블릿을 버리기 전에 배터리를 스스로 갈아본다든지, 냄새 나는 싱크대에 락스만 쏟아부을 게 아니라 호스를 직접 교체한다든지 하는 기회들이 조금만 돌아보면 널려 있다. 쪼들리며 아껴 살라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진짜 주인처럼 살아보자는 것이다.
네트워크와 IT 인프라 내 온갖 취약점과 고장을 매일 마주해야 하는 보안 담당자라면, 이런 습관이 이미 배어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보안 담당자라면 이미 그 조직의 가장 실제적인 주인일 것이다. 각종 사고 사례를 들먹이며 경영진과 직원들을 압박하는 보안이 아니라, 같은 ‘No’를 말하더라도 어떻게든 Yes에 가까워지려고 How를 고민하는 보안, 즉 고쳐 쓰려는 보안이 우리를 진짜 주인으로 만들 것이다. 엄격한 규칙이라는 속성을 가진 시간이지만 개인적인 시차를 허락하며 숨쉴 틈을 주는 것이 왜겠는가. 어떻게든 이 단순하도록 극단적인 인간들을 고쳐 쓰려는 것이다. 그게 모든 수명과 사건, 역사와 한계의 주인인 시간이 우리를 다스리는 법이다. 그렇게, 그 거대한 주인은 우리에게 연말과 연시라는 기회를 깜빡 속은 것처럼 주려 하고 있다.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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