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지식 발휘해 도움 ‘주고’ 오지만, 얻는 것 더 많아
대기업이 판로 뚫어주면 우리나라 보안업체들 성장할 것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카스퍼스키. 구글 프로젝트 제로. 체크포인트. 시만텍. 시스코. 인텔 시큐리티, 크라우드스트라이크, 파이어아이. 매달 엄청난 보고서를 발간하고, 제품을 만들고, 심지어 가끔씩 무료 툴까지 배포하는 거인들. 사이버 보안 환경의 깊은 안목을 때론 호들갑스럽게 때론 호소력 짙게 전달하고, 주요 매체들마다 이런 기업들의 주요 임원들 멘트를 따다가 여론을 빚어낸다. 가만히 앉아서 뉴스만 보자니 정보보안 업계는 이런 거인들 몇몇이 다 장악한 것처럼 보일 정도. 그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 “그럼 우리나라 정보보안 기술이 갖고 있는 경쟁력은?”

미국, 중국에는 없는데 한국에만 있는 경쟁력
고려대학교 이희조 컴퓨터학과 교수는 “나라 밖으로 계속 다녀보니 의외로 우리나라만이 가진 경쟁력이 있더라”라고 말한다. “IT 기업 혹은 주요 보안기술은 대부분 미국에서 나옵니다. 기술적으로는 이스라엘 업체들도 뛰어난 면모를 자랑하고 있고, 최근엔 중국이 IT 시장에서 강세를 펼치고 있죠.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쟁력을 찾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미국은 세계 시장에 의외로 적들이 많습니다. 중국도 주변국들에게 그리 사랑받는 나라는 아니죠. 정보보안은 분야 특성상 기술을 도입하려면 매우 깊은 곳의 비밀과 치부, 정보들을 다 드러내야만 합니다. 그런데 중동 국가들이 아무리 기술이 좋다한들 미국 기업에게 연락할까요? 이스라엘과 파트너십을 맺을까요? 중국 정부와 시장의 관계를 온 세계가 다 알고 있는데, 중국 보안기업이 선호될까요?”
그럼 기술력이 좋은 나라 중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 ‘중립적인’ 국가들을 추려야 하는데, 그때 우리나라가 많이 물망에 오른다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이나 필리핀, 코스타리카 등 아시아와 남미 지역의 나라들이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을 통해 정보보안 향상을 위한 자문을 십여 년 전부터 요청해왔고,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자문 제공 서비스(공식 명칭은 개발도상국 방송통신 정책자문 사업이다)를 이희조 교수 등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들이 지금까지 꾸준히 실행하고 있다. “2006년 필리핀을 시작으로 올해 몰도바까지 연간 프로젝트로 진행했습니다. 저는 그 중 총 6번 참여했고요.”
당연하다는 말 무색케 하는 판이함
프로젝트를 연단위로 진행하는 이유는 나라마다 환경과 상황이 다르고 요구사항이 달라 가장 최적화된 보안 모델 및 해결책을 제시하려니 긴 조사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예를 들면 필리핀은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한국처럼 유선 네트워크가 발달될 수 없습니다. 대신 무선 네트워크가 많이 사용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모바일 보급률이 유선 인터넷 보급률보다 훨씬 높죠. 우즈베키스탄이나 캄보디아는 광대역이 이웃 국가와 연결되어 있어서 원활한 통신을 위해 광대역을 넓히려면 외교 절차까지도 동원되어야 했고요.”
네트워크 환경이 다르니 특별히 유념해야 하는 공격 유형도 당연히 달랐다. “어떤 나라는 스팸 공격이 특별히 심한 데가 있었고, 디도스 공격이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나라도 있었습니다. 분명히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을 통해 들어오는 요구는 CERT 창설이나 인증 인프라를 구축해달라거나 보안 교육 체계를 만들어달라는 건데, 들여다보면 또 나라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달랐던 거죠. 아까 ‘정보보안 컨설팅은 치부까지도 다 드러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게 이런 맥락의 문제였던 겁니다. 예를 들면 필리핀은 아동 학대 및 아동 포르노 문제가 사이버 보안 문제와 깊게 얽혀 있었습니다. 특히, 외국인들이 필리핀에 와서 필리핀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심각했죠. 또한, 코스타리카는 청소년들이 인터넷을 통해 유해 정보에 노출되지 않도록 인터넷에서 청소년 보호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킹과 악성코드 방어 뿐 아니라 청소년 보호 프로그램도 제안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충돌이 많아 해당 국가 담당자 및 담당 부서와 일을 진행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정보보안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곳인 국가들이라 우리나라 같으면 당연히 큰 조직에서 많은 인원이 달라붙어 해결해야 할 일을 직원 두 명이 붙잡고 있기도 하고, 생소한 정책이나 관리 모델에 대해서 설명하려니 이해하지를 못하기도 했죠.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당연한 게 아닐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정보보안 전문가로서 시야가 넓혀진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끝장 토론’을 벌인 상대국 담당자와는 깊은 신뢰가 만들어지기도 하고요.”
▲ 고려대학교 이희조 컴퓨터학과 교수
왜 사서 고생하나?
기자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런 ‘끝장 토론’과 생소한 땅으로까지 발품을 파는 것,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팀원들을 만나 토론하고 자료를 작성해 실제로 그 나라에 도움이 될 만한 방안을 마련하는 건 ‘남는 시간’에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즉, 대가나 보수는커녕 정상적인 업무도 다 마치고, 각종 주요 모임과 행사도 다 참석하면서 밤에 돌아와 이 일에 착수해야했다는 것이다. 의외로 그 이유는 실질적이었다.
“개발도상국을 돕는다는 의미도 크지만, 우리나라의 업체들과 기술들을 소개하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자문까지만 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지, 솔루션을 실제로 구매하게 하지는 못합니다만, 아무래도 상담 받는 국가 쪽에서는 우리가 제시하는 모델을 도입할 확률이 크고, 그렇다면 한국의 자원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더 높죠. 그런 일들이 실제로 성사되기도 했고요.”
한 마디로 판로 개척을 위한 목적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여러 국가들을 다니다보니 “협력을 통해 더 잘 할 수 있는 방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바로 보안기업들과 대기업들의 상생 모델이다. “세계 곳곳에 판매망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이라면, 미국과 중국을 꺼려하고 한국을 선호하는 시장과 우리나라의 영세한 보안업체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 게 안타깝습니다. 무료 봉사가 아니라 계약을 맺는 등 사업을 벌여볼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세계 시장으로 우리나라 보안업체들이 진출하지 못하는 이유가 기술력 부족일 수도 있고, 언어장벽일 수도 있지만 마케팅 할 돈이 없다는 것도 꽤나 큰 이유입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시장 역시 가난한 곳이 많고요. 대기업이 이 둘을 서로 만나게만 해줘도 스파크가 팍 튀길 겁니다.”
보안으로 말을 걸고, 대화가 시작되고
그러나 낭만적 요소가 0%도 섞이지 않은 건 아니다. “우즈베키스탄에 갔는데 삼겹살집이 있다고 해서 다 같이 가서 식사를 했지요. 그랬더니 누군가 떠듬떠듬 한국말로 말을 거는 거예요. 고려인 3세인 주인이었죠.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전쟁과 식민지 통치 때문에 강제 이주 당한 우리 선조들의 후손과 제가 어떻게 대화를 해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아픈 역사를 그저 책을 통해 읽는 것과 직접 현장에서 그 후손의 손 한 번 잡아보는 건 정말 다르더군요. 그런 기억들은 가끔 제 강의실에서 재생돼 학생들에게 전달되곤 하지요.”
아침마다 밭일을 마치고 출근을 한다는 코스타리카 장관도 그의 기억에 선하다. “코스타리카가 분명히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훨씬 낮은 곳이긴 합니다만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저희와 일했던 부서의 장관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아내와 함께 자기 농장을 돌보고 9시에 집무실에 나오던 분이었습니다. 나와서 저희한테 오늘 어떤 채소가 자랐고, 우유를 얼마나 짜고 그 맛이 어땠는지 정말 행복하게 이야기하시던 분이었어요. 자기는 농사가 정말 좋고, 나중에도 농사를 계속 지을 거라고 해맑게 얘기하시는데, 듣는 저희까지 다 행복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지금도 코스타리카 커피를 마실 때면 그 순간의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온갖 보안 관련 전문서적들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이희조 교수의 책장 맨 윗칸 구석에 코스타리카에서 온 커피 봉지가 서너 개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옆엔 방금 누군가 음미를 마친 듯한 커피와 커피포트가 놓여 있었다. “고정관념이 깨지고,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는 순간 느끼는 행복의 여운은 생각보다 길게 갑니다. 저는 정보보안으로 말을 걸었을 뿐인데, 그들은 더 많은 것들을 되돌려주더라고요. 자기 일 하면서 행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개발도상국 지원 프로젝트는 저를 더욱 행복하게 해줍니다.”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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