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강력 범죄 소식은 듣는 사람들을 분노케 한다. 그런 소식이 짧은 시일 안에 여기 저기 들리는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인면수심을 한 나쁜 놈들이 우리 주변에 이렇게나 많았나,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는 처벌과 죗값을 이야기하며 손가락질을 아끼지 않는다. 또 한 편에서는 그런 그들에 대한 용서와 또 다른 기회를 주장하기도 한다. 범죄를 놓고 우리의 생각은 늘 그 둘 중 하나다. 죗값을 받게 하자, 혹은 새로운 기회를 주자.
[이미지 = 교보문고]
물론 처음부터 나쁜 의도를 가지고 계획을 세워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그 나쁜 짓을 그대로 실행해버린 경우에는 이런 논쟁이 불필요하다. 그런 놈들은 그냥 벌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그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어떨까? 즉 마음에 병이 있어 일반적인 사고나 감정 조절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비극이 일어난 것이라면, 그럼에도 계획 범행을 저지른 자와 똑같은 형량을 부여해야 하는 걸까? 그게 정의일까? 이는 끝날 줄 모르는 논제다.
치료감호소에서 정신병을 가진 범죄자들을 매일 다루는 의사 차승민 씨는 <나의 무섭고 애처로운 환자들>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 오래된 논제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정신병을 가진 채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치료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권이 소중해서도 아니고, 현재 우리나라의 법이 너무 엄중해서도 아니다. 치료가 곧 벌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용서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치료와 교육을 통해 자기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끔찍한지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부터가 진짜 벌의 시작이고, 그런 자각을 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되며, 그런 뼈저린 이해와 후회가 바탕이 되었을 때 재범 확률이 의미 있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의학적으로나 법리적으로 얼마나 옳거나 그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용서와 처벌이 본질상 한 끝 차이라는 그의 지적은 꽤나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자기 행위에 대한 자각이 그 자체로 벌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용서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는 건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숱하게 교육 받아온 ‘양심의 가책’이라는 게 바로 그 말 아닌가? 큰 잘못을 저질러 양심이 괴로울 때는 그 어떤 외부의 벌도 달게 느껴질 정도이고, 그 양심의 문제가 해결되면 그것만큼 마음이 가벼워지고 살 맛이 날 때가 없다는 것, 살아가면서 한 번씩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결국 치료든 훈련이든 각종 현대 정신과 프로그램들을 동원해서든 범죄자들의 굳은 마음을 풀어 양심을 되살리면, 그것에서부터 진정한 벌과 진정한 용서가 시작된다는 것이 치료감호소 주치의의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양심에서 비롯되지 않은 벌을 받은 자(즉, 자기가 지은 죄가 어떻든 지금 받는 벌이 너무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수감 기간 동안 뉘우치거나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며(즉 용서에 대한 작은 열망조차 없으며), 모든 형벌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죄를 짓고 감옥이나 치료감호소로 복귀할 확률이 높다고 책에는 나와 있다. 그러므로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려 하지 않고 합리화를 하거나 거짓말까지 하려는 사람들은 치료 효과에 대한 기대감도 낮다고 하는데, 이들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사이코패스다.
사이버 보안 분야의 사건과 사고들을 다루다 보면 해커라는 부류에 대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도무지 평범한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집요함과 공격성이 눈에 띌 때면 더 그렇다. 유명한 핵티비스트 단체 어나니머스(Anonymous)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기록을 엮은 책 <어나니머스의 많은 얼굴들(Hacker, Hoaxer, Whistleblower, Spy : The Many Faces of Anonymous)>에는 저자와 해커 사이에 오간 대화들이 조금씩 나오는데, 읽다 보면 삶은 고구마를 김치나 우유 없이 스무 개 정도 연달아 먹은 느낌이 날 때가 있다. 해커들의 대화 방식(그러므로 사고방식)을 일반인의 사고로는 쫓아가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정확히 뭐가 힘들었을까? 기자의 경우 일반적이지 않은 대화의 흐름도 그렇지만 특히 그 끝없는 자기 합리화에서 숨이 턱턱 막혔다. 볼멘 변명이 아니라 확고한 신념에서부터 나오는 그 당당함은 텍스트만으로도 충분히 분출되는 느낌이었다. 굳이 그 책이 아니더라도 이따금씩 해커와의 인터뷰에 성공했다는 외신의 기사들에서도 해커들은 “국가와 사회와 시대가 너무나 잘못이 커, 자신들이 해킹 공격을 할 수밖에 없게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경우들이 드물지 않다. 단골 멘트를 넘어 레파토리 수준이다. 어떤 나라의 정부 기관이 너무 큰 잘못을 해서, 누군가 자기 배만 불려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옳거나 정의롭지 않아서...
인터뷰라서 그렇게 허세 섞어 말들을 하는 건지, 정말 저 깊은 속에서부터 그런 생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승민 의사의 책을 읽은 후부터는 전자이기를 바라고 있다. 가책이 없는 이들보다야 허세부리는 사람이 아무래도 보안 업계가 상대하기에는 쉬울 거 같아서다. 그러고 보면 가책 없는 합리화와 근거 없는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해커보다 돈을 목적으로 한 공격자들이 선녀로 보일 지경이기도 하다. 돈을 훔친다는 행위의 범죄성은 꽤나 분명하여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런 해커들 중 스스로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조금씩 이슈화가 되고 있는 사회 현상 중에 ‘키덜트’가 있다. 육신의 나이는 차는데 정신의 나이가 너무 느리게 쫓아오는 경우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나이대가 점점 높아지고 있고,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즐기는 문화를 성인이 된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데, 마치 온 세상이 네버랜드화 되어가는 듯하기도 하다. 이랬을 때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은 이 수많은 피터팬들이 각자 자신만의 진실을(own version of truth) 갖게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문법적으로 오류를 내고도, 심지어 철자를 틀리고도 회사에서 지적을 당하면 ‘우리 부모님은 이렇게 쓰시더라’라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라고 이코노미스트에서 사례를 든 적이 있을 정도다.
예전에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coming을 comming으로 자꾸만 쓰기에 바로잡아 준 적이 있었다. 그는 발끈했다. 자기는 미국에서 현재 거주하고 있는데,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영어 철자를 지적하는 게 웃긴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comming으로 나온 각종 텍스트들을 캡쳐하여 보내기 시작했다. 미국 신문 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지인들도 이렇게 쓰니까 comming도 허용이 된다, 심지어 20년째 미국에서 거주하는 자기 고모도 comming이라고 쓴다고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구글에 comming을 검색하면 ‘coming의 흔한 철자 오류’라고 제일 위에 뜬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자신과 고모분의 미국 거주 사실이 더 믿을만한 근거였다. 십년도 넘은 옛날 일인데, 아직 그분의 comming은 comming으로 남아 있는지 coming으로 옳게 교정되었는지 궁금할 때가 가끔 있다. 물론 그 때 기자는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그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게 점점 드문 일이 되어가고 있다. <어나니머스의 많은 얼굴들>에 의하면 핵티비스트들은 오래 전부터 그래왔고, <나의 무섭고 애처로운 환자들>에 의하면 사이코패스들은 원래부터 그랬단다. 우리가 알기에 정치인들을 비롯해 공인들도 점점 그런 쪽으로 변하고 있고, 이제는 자라지 못하는 어른들도 그 속에 끼어들고 있는 중이다. ‘어른이 되기 싫다’거나 ‘난 키덜트다’라는 말을 당당하게 내뱉는 유명인들을 보곤 하는데, 그게 그저 특정 문화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맥락에서만 하는 말이기를 바란다. 뭔가에 책임을 지고, 잘못에 대해 가책을 느껴 자가 수정을 한다는 정상적인 어른의 자연스러운 면모까지 거부하는 말이라면 ‘나는 사이코패스’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 그건 크게 자랑할 만한 말이 아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거, 사과할 줄 모르는 거, 그러면서도 고개를 빳빳이 유지하는 것은 당당함 혹은 당돌함이 아니라 정신의학적으로 봐도 미친 거다.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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