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 역사, 그날] 1999년 1월 6일, 해커들이 뜯어 말린 전자전 선포

2025-01-0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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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킹 집단이 대담하게도 두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동시대 해커들이 이를 말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에고 높은 해커들이 그 만류에 수긍했다.

3줄 요약
1. 1998년 12월 말, 한 해킹 집단이 중국과 이라크 정부에 전쟁을 선포.
2. 그런데 당시 활동하던 여러 해킹 단체들이 성명서를 내면서 비판
3. 전쟁 선포 하고서 1주일도 되지 않아 철회.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전쟁을 선포한다’는 말의 무게감이 점점 희석되고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진짜 전쟁을 겪은 지 꽤나 긴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화약 폭발음이 시도 때도 없이 들리고, 피비린내가 거리에 진동하며, 어디를 가도 나뒹구는 시체를 보는 끔찍한 경험이 대부분의 우리와는 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일상의 언어에서 ‘전쟁’은 이제 ‘다툼’이나 ‘싸움’보다 약간 더 격렬한 것을 나타내는 수사일 뿐이다. 덩달아 ‘전쟁 선포’라는 말 역시 한껏 부드러워진 상태다.


[이미지 = gettyimagesbank]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흔히 ‘세기말’로 불리던 1999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때라고 해서 ‘전쟁’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이 지금보다 막중했다고 하기는 힘들다. ‘전쟁을 선포한다’는 건 적대감을 나타내는 흔한 표현 중 하나였을 뿐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영화 대사로서도 흔하게 소비가 됐다. 그러나 그 대상이 실제 한 국가이지는 않았다. 아마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쟁 선포가 단순 수사일 땐 그 대상이 일개 사인이나 사조직일 경우이지, 국가가 된다면 어감이 상당히 달라진다.

그런 암묵적 금기를 깬 해킹 조직이 있었다. ‘지하군단’이라고 번역하면 될까 싶은 이름의 ‘Legions of the Underground’였다. 이들은 1998년 12월 29일 중국과 이라크 정부가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며 전쟁을 선포했다. 정확히 말하면 ‘정보전 선포’였다고 할 수 있다. “시대가 부른다면 우리는 전자전을 시작하고, 그 전쟁에서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들은 당당히 선포했다. 이미 이라크 내 여러 시스템들과 서버에 불법 접속을 시도한 상황이었고, 일부는 연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권’은 해커들이 자주 발끈하는 주제 중 하나다. 지금도 핵티비스트들은 전쟁을 일으켜 민간인들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조직들이나 다양한 방법으로 국민들을 탄압하는 정부들을 표적으로 삼아 디도스 공격을 하거나 정보를 빼돌리는 등 적잖이 성가시게 군다. 하지만 이는 일부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기점으로 해서 현대의 핵티비스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정권이나 이념의 편을 드는 데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이상을 추구한다기보다 정치인화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이른 바 특정 세력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98년 당시 ‘지하군단’이 중국과 이라크라는 주권 국가들을 대상으로 선포하자 해커 커뮤니티가 크게 들끓었다. 당시에도 이미 유명한 해커 집단들이 있었는데, 지금의 악명 높은 사이버 범죄자들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90년 대 유명한 해커들이라면 범죄 집단이라기보다 핵티비스트 집단에 가까웠고, 아직 정치적 색을 물씬 풍기기 전이라 보다 보편화 된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들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고, 그 자부심을 지키기 위한 그들 만의 행동 규범이나 윤리관도 암묵적으로 존재했다.

‘지하군단’의 전쟁 선포는, 그 이유가 인권 탄압에 있었음에도, 당시 해킹 조직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당시 전쟁 선포에 반대하기 위해 해커 조직들이 발표한 성명문에 잘 나와 있다. “지금의 상황을 바꾸는 데에 지하군단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세계 여러 곳에서 활동하는 해커들의 권리를 위협하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다. 한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는 건 해킹 그룹이 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한 일이며, 이들의 전쟁 선포는 핵티비즘이나 해커 윤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선포한다. 전쟁 선포는 해커가 자랑스러워 할 일이 아니다.”

여기에 서명한 그룹은 2600, 카오스컴퓨터클럽(Chaos Computer Club, CCC), 로프트헤비인더스트리즈(L0pht Heavy Industries), 프랙(Phrack), 톡신(Toxyn), 컬트오브더데드카우(Cult of the Dead Cow, CoDC), 히즈파핵(Hispahack), 풀하스(Pulhas) 등이었다. 당대에는 꽤나 명성을 떨치던, 영향력도 적지 않았던 단체들이었다. 여기에 일부 개인 해커들도 동참했다. 전쟁 선포라는 말이 한 국가를 겨냥하고 있을 때 무게감이 다르다는 걸 직시하며, 해커 윤리와 맞지 않는다고 선을 그은 것이 인상적이다.

이 말에 ‘지하군단’도 설득되었거나, 수긍한 것으로 보인다. 얼마 뒤인 1999년 1월 6일 이들은 자신들의 말이 지나쳤음을 인정하고 전쟁 선포를 철회했다. “우리가 전쟁 선포라는 표현을 쓴 건 사실이지만, 우리의 진짜 의도는 정말로 전쟁을 하자는 게 아니었다. 두 나라에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뭔가를 파괴하려는 건 우리의 본래 뜻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세기말 1월부터 있을 뻔한 전쟁 하나가 무마됐다.

요즘이라면 어땠을까?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저작권자: 보안뉴스(www.boa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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