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XXX-7955. 80년대 기자의 집 전화번호다. 길을 잃었을 때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이 번호를 꼭 읊어야 한다며 부모님께서 틈나는 대로 확인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물론 지금은 없는 번호다. 얼마나 반복해 학습했으면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없는 번호가 기억이 날까. 이 번호를 떠올리면 꼬리를 물고 다른 번호도 자동으로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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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X-7942. 당시 붙어 다니던 친구 녀석의 집 전화번호다. 7942라는 숫자를 ‘친구사이’로 읽을 수 있어서 단박에 외울 수 있었던, 그리고 아직까지 기억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친구의 전화번호다. 물론 이것 역시 지금은 없는 번호다. 그 친구도 연락이 끊긴 지 20년이 지났다. 결혼해서 다자녀 가정을 꾸렸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들은 게 전부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부모님의 형제가 적어도 6, 7명이 되는 시대에 자라다보니 친척집이 양가 합해서 열 집이 훌쩍 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한 학급 인원이 70명을 초과하는 통에 오전 반 오후 반으로 나눠서 학교를 가야 했던 우리 세대 친구들이 전부 그랬다. 그런데도 우리 대부분은 그 많은 친척집 전화번호를 어느 정도는 외우고 있었고 반 아이들 전화번호도 꽤나 많이 외우고 다녔다. 물론 그 시대라고 해서 우리 머리가 무공해로 뛰어났던 건 아니라 외울 수 있는 번호의 수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너와 나는 서로의 번호를 외우고 있다’는 건 친밀도의 척도가 됐다.
다행히 한 집에 번호가 하나 둘밖에 없던 때였다. 암기할 번호의 양이 거기서 거기였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친구 번호라고 외운 그 일곱 자리 숫자가 사실 친구의 아버지 번호도 될 수 있었고, 친구의 어머니 번호도 될 수 있었으며, 늘 어려운 존재였던 친구 형의 번호도 될 수 있었다는 의미도 된다. 조금 소심한 성격을 가진 아이는 벨이 울리는 동안 누가 받을 지 몰라 초조하게 전화기 줄을 배배 꼬면서 1초 1초를 영겁처럼 기다리기도 했다. 짝사랑하는 이성 친구 집에 용기 내어 전화할 때 이 불안감은 무한정 증폭하기도 했다.
그 암기의 시대를 관통하는 또 다른 단어가 있으니 ‘반공’과 ‘스트리트파이터 2’다. 당시 학생들은 방학마다 반공 도서를 읽고 독후감을 제출해야 했다. 조금 커서 알게 됐는데, 그 때를 ‘냉전시대’라고 하더라. 뉴스와 신문에는 레이건과 고르바쵸프라는 이름이 심심찮게 나왔고, 암기에 능숙했던 꼬마들은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라도 이름 정도는 노력 없이 외울 수 있었다. 그 중 고르바초프는 스트리트파이터 2 제일 마지막 신에 등장하기까지 했으니, 우리에게는 친숙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감히 ‘반공(냉전)’에 필적할 정도로 80년대 남아들에게는 스트리트파이터 2가 중요했다. 100원짜리 동전 하나 넣고 몇 판을 깼느냐, 끝판까지 가 봤느냐, 엔딩 신을 몇 개 보았느냐에 따라 아이들 사이에서 주목도가 달라졌으니, 우리에게는 피부에 와닿는 문제였다. 되도록 끝판을 깨본 진영에 속하고 싶었고, 거기에 속해서 아직 이곳에 오르지 못한 미천한 것들을 손가락질 해보고 싶었다. 우리는 각자 동네의 오락실에서 틈나는 대로 연습했다.
그러는 사이 세상도 두 개의 진영으로 갈리어 있었다. 당시 모든 것들이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명확히 구분됐었다. 독일군과 소련군은 늘 나쁜 놈으로 묘사됐고, 그들을 물리치는 건 늘 미국이었다. 미국의 드라마나 영화는 캘리포니아의 따스하고 열정적인 분위기를 적극 차용했고, 소련을 대표하는 기후는 시베리아의 혹한이었다. 게다가 따듯한 남쪽과 추운 북쪽으로 나라가 동강 나 있기도 했으니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착한 나라는 따뜻하고 나쁜 나라는 춥다는 식의 느낌마저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겨울이 되면 뭔가 음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근거 없는 불안감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전화번호는 스무 개씩 기본으로 외웠고, 스트리트파이터 2를 통해 여덟 개나 되는 캐릭터를 익혔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양분화 하나뿐이었다.
그 상태가 지속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차츰 오락실로 가지 않게 됐다. 대신 소련이 붕괴되는 것을 목도하고, 미국이 단 하나의 슈퍼네이션으로 군림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러면서 ‘반공’이라는 단어는 ‘냉전’으로 확대됐는데, 그 냉전마저 한물 간 것이 됐다. 국제우주정거장이 화합의 상징으로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시대가 왔고, 나쁜 놈과 착한 놈의 구분은 촌스런 세계관이 됐다. 게다가 삐삐니 핸드폰이 등장하면서 우리 머릿속의 전화번호들도 빠르게 사라졌다. 암기력은 더 이상 친밀함의 척도가 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내 전화번호 하나라도 떠듬떠듬 외우면 다행인 상태로, 셀 수 없이 많은 - 너무 많아 뭔가가 크게 유행하지도 않는 - 게임과 콘텐츠를 접하며, 얘도 좋고 쟤도 좋다는 묽어진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이것마저 커다란 변화를 맞닥트리고 있다. 암기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보안 사고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이제 우리는 전화번호가 아니라 비밀번호를 수없이 외우기를 차츰 강조하고 또 강요받는 때로 접어들고 있는 것부터 심상치 않다. 하지만 우리의 암기력은 예전의 그 암기력이 아니다. 그래서 비밀번호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기술들이 여러 가지로 개발되고 있고, 그것들 중 몇몇이 우리를 비밀번호의 바다에서 구조할 예정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숫자열이나 문자열, 혹은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그 당시 전화번호들처럼 잔뜩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 때가 다시 오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슈퍼네이션 미국의 위치 역시 이 사이버 공간에서 계속해서 허물어지고 있다. 소련의 본체였던 러시아가 여전히 미국의 주적으로서 미국을 해킹하고 있고, 여기에 더해 중국마저 세력을 키워 여러 전선에서 미국과 대등한 경쟁을 하고 있다. 중국의 해커들 역시 미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그러면서 보안 업계는 냉전 시대의 그것처럼 세계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다루기 시작했다. 해킹 공격을 하는 진영과, 그것을 계속해서 방어하는 진영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이고, 후자는 서방 국가들과 그 동맹들이다.
스트리트파이터 2는? 찾아보니 작년에 6까지 나왔다더라. 그 때 8개 캐릭터의 각종 기술을 익히는 것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18개라고 하니 내 평생 다시 손 댈일이 있을까 싶다. 다만 그 때의 우리들이 동네에서 벌였던 비공식 토너먼트가 이제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린 세계 대회로까지 자라났다고 하니, 스케일이 좀 커졌을 뿐 결국 오락 실력으로 계급이 결정되는 일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나보다. 전화번호를 외웠다가, 외우지 않아도 됐다가, 다시 다른 걸 외우고 있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세계 질서가 끊임없이 개편되는 동안 오락 하나만 고고히 본질을 지키고 있었던 건가.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고 있자니 어렸을 때로 되돌아가는 기분이 들어 반갑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잊었던 친구의 번호와, 전화기 버튼 누를 때의 그 고유의 음들이 머리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는가 하면 당시 장마철 먹구름처럼 늘 우리를 감싸고 있던 전쟁의 불안함도 생각난다. 이 시대는 또 다시 반환점을 돌아 우주정거장의 시대를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더 옛날로 돌아가 본격적인 충돌로 귀결될 것인가. 우리는 돌고 돌아 어디에 도착하게 될까.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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