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번호 외우고 다니듯 암호 외우고 다녀야 하는 시대 세계 패권을 놓은 소리 없는 전쟁 다시 시작되는 듯해
[보안뉴스 문가용] X84-7955. 연도까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예전에 길 잃어버리거나 할 때 이 번호를 꼭 읊으라며 부모님께서 틈나는 대로 물어보아 확인하시던 예전 집 전화번호다. 어찌나 달달 외웠으면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도 기억이 날까. 뿐만 아니라 당시의 집이라고 생각되는 그 집의 구조와 동네의 분위기도 함께 주억주억 퍼 올릴 수 있다.
X85-7942. 그 비슷한 즈음에 붙어 다니던 녀석의 집 전화번호다. 앞자리는 ‘우리 집 번호 앞자리 +1’이었고 뒷자리는 발음상 ‘친구사이’로 읽을 수 있어서 단박에 외울 수 있었던, 그리고 아직도 기억나는 유일무이한 친구의 전화번호다. 그 친구 집은 우리 동네 제일 꼭대기에 있었고 한창 바퀴에 미쳐있던 시절, 자전거부터 스케이트보드에 롤러스케이트까지, 그 친구의 집에 전화를 걸어 함께 내리막길을 굴렀다.
부모님 형제가 적어도 6, 7명이 되는 세대에서 나고 자라다보니 친척집이 양가 합해서 열 집이 훌쩍 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60명, 70명이 넘어 오전 반 오후 반으로 갈리던 우리 학교 아이들이 전부 그랬다. 그리고 그 반 아이들 대부분은 친척집 전화번호를 어느 정도는 외우고 있었고 반 아이들 전화번호도 꽤나 많이 외우고 다녔다. 당연히 다 외울 수는 없었으니 외울 것을 선택해야 했고, 그래서 번호를 외운다는 건 친밀도의 표시였다. 친하니 자주 전화를 하고, 자주 전화를 하니 번호가 자연스럽게 외워졌던 면도 있다.
한 집에 번호가 하나 둘밖에 없던 때였다. 친구 번호라고 외운 그 일곱 자리 숫자는 사실 친구의 아버지 번호도 될 수 있었고, 친구의 어머니 번호도 될 수 있었으며, 늘 어려운 존재였던 친구 형의 번호도 될 수 있었다. 조금 소심한 성격을 가진 아이는 벨이 울리는 동안 누가 받을 지 몰라 초조하게 전화기 줄을 - 가뜩이나 용수철처럼 생긴 그거 - 배배 꼬면서 1초 1초를 영겁처럼 기다리기도 했다. 사실 좋아하는 이성 친구 집에 용기 내어 전화할 때 이 소심함의 표출은 누구나 공유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행동 패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 문제는 훨씬 나중 일이고, 내가 거는 이 전화를 누가 받을지 모르는 불안감 같은 건 방학 때마다 숙제로 나오던 반공 독후감 쓰기도 대범하게 거르던 녀석들에겐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라는 이름이 뉴스에 심심찮게 나오는 통에 반공을 그저 ‘북한 싫어’라고만 알던 코흘리개 꼬마들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나라의 관계를 들어 아는 정도였는데, 개중에서 조금 나은 아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게임 끝에 나오는 고르바초프 대통령 캐릭터의 이마 얼룩이 사실은 소련 지도라는 고급 시사정보를 흘려주기도 했다.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게임을 깼나 못 깼나의 기준으로 친구들 사이의 위상이 갈렸듯 세계는 두 가지 진영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 세상의 모든 좋은 놈 나쁜 놈들은 명확히 편이 갈렸다. 독일과 소련군은 늘 나쁜 쪽이고 그걸 물리치는 미국은 정의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캘리포니아의 따스한 기후가 미국의 특성이고 시베리아의 혹한이 소련의 그것이라고 여겼고, 결국 따뜻한 나라 착한 나라, 추운 나라 나쁜 나라가 되었다. 아직도 겨울이 되면 뭔가 음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근거 없는 예감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젊거나 어렸을 때 일어났던 전쟁으로부터 시작한 세계의 냉기가 전화번호를 열 개 스무 개씩 외우고 다니던 후손들에게 미친 영향은 세상에 대한 딱 두 가지 구분방식이었다.
마침내 소련이 갈가리 찢겼을 때 우린 세상을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구분방식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일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새로운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은 머리 좀 컸다 생각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어쩌면 고르바초프의 머리 지도가 다르게 나를지도 몰라. 패치나 업데이트가 흔치 않던 시절인데, 스트리트 파이터의 끝판 왕을 향하는 우리들의 마음엔 그런 막연한 희망도 있었다. 미래가 가져다 줄 편리한 기기들 때문에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올 줄 꿈에도 모른 채 그 많은 번호를 외우던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오락실에서부터 세상의 온도에 영향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런 때가 지나고 입시에 돌입하면서 우린 더 똑똑해졌고, 대신 세상 - 뉴스, 오락실 등등 - 과 멀어졌다. 미국은 단 하나의 슈퍼네이션으로 군림하기 시작했고, 그 사실 하나만 알면 충분했던 우리는, 게다가 반공 교육도 멈췄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뭐, 영향이 없지 않았겠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삐삐가 등장하고, 핸드폰이 등장하면서 우린 더 이상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게 되었고, 친밀도라는 개념도 묽어져 갔다. 대신 손 안에 들어오는 신기한 기술들에 재미를 붙여 살았다. 조금 있으니 노래며 만화책이며 영화도 그 손안에 들어왔다. 고르파초프 나오던 스트리트 파이터까지.
그렇게 한 발 떨어져 흐름을 타니 편했다. 세상은 이 방향으로 계속 흘러갈 거 같았다. 미국은 영원하며 기기들은 계속 작아지고 우리 머릿속에는 어떤 숫자의 조합도 필요 없는 방향 말이다. 딱히 재미있지도, 나랑 상관있지도 않은 방향.
그런데 그 방향이라는 것이 원운동을 하고 있었나, 시대를 예전으로 돌리고 있다. 너무 많은 보안사건 때문에 암호를 자주 바꾸라는 권고 사항은 이제 사용하는 온라인 사이트마다 암호를 다르게 사용하라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네이버 메일에 들어갈 때, 쿠팡에서 쇼핑을 할 때, 회사 관리자 페이지에 들어갈 때 암호를 다르게 하라는 것이다. 내가 어느 사이트에 자주 들어가느냐에 따라 암호 역시 친밀도의 척도였던 전화번호처럼 잘 외워지거나 자꾸 잊어버리겠지. 나랑 친한 친구 대신 나랑 친한 사이트가 확인되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굳건했던 미국은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해커들로부터 계속해서 시달리고 있다. 당연히 미국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새로운 냉전 시대, 사이버 냉전시대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전쟁보다야 평화가 당연히 추구되어야 하지만 민주주의도 3권분립 체제로 운영되는데 어쩌면 세계는 단독 파워 체제 아래 너무 오랜 기간 지내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슬 들기도 하는 때다. 아니면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어린 시절의 이기주의가 다시 새록새록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싸움 구경 재미있는 건 고칠 수 없는 것인지.
기사를 통해 오랫동안 잊어왔던 외우기 습관을 수차례 반복 강조하며, 또 다시 찾아오는 냉전시대의 전조들을 접하며, 큰일났다는 생각보다 어렸을 때 생각이 먼저 나 괜히 두근대는 건 철없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굳은 머리로 암호를 여러 개 외우는 것이 생각만큼 안 될 수도 있다. 전화기 배배 꼬던 추억은 로그인 되기 직전 이 암호가 맞나 틀린가 긴가민가한 불안감 정도로밖에는 대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소리 없는 싸움은 가뜩이나 그 세 나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한국의 미래에 어떤 작용을 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그래도...
북한이 탈북민 문제나 김정은의 건강 문제로 점점 더 흔들리고 있는 때, 그래서 반공교육을 할 때만큼 북한의 존재감이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할 때, 마침 터지고 있는 냉전시대의 기류와 암호를 여러 개 외우고 다녀야 하는 생활상의 변화는 2, 30년 전의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돌고 돌아 어디에 도착할까. 어차피 흐르는 시간, 걱정 대신 두근거림과 추억과 대조해가며 바라보는 것은 또 하나의 사는 방식이 된다.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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