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비속어 ‘병먹금’, 독일 총리가 말할 줄이야
[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2025년 1월 2주차 <보안뉴스>가 선정한 키워드는 ‘트롤’이다. 세계 1위 부자인 일론 머스크가 미국 대선에서 승자가 된 뒤 유럽에서도 종횡무진 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런 머스크를 유럽의 지도자들은 트롤 취급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때 획기적인 발명가였던 그가 왜, 어떤 계기로 정치적 영향력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던 것인지 궁금해진다.
1. 독일 vs. 머스크
얼마 전 독일의 연정이 붕괴되면서 숄츠 총리가 물러나는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선거를 통해 다시 한 번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고, 따라서 예정보다 훨씬 이른 총선을 치르게 됐다. 여기까지야 어느 나라에나 늘 있는 일이라 크게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유럽연합 내에서 가장 막강한 경제력과 영향력을 가진 나라인 독일이기 때문에 간과하기는 힘들다. 독일이 멈추면 유럽연합도 멈추고, 독일이 방향을 정해야 유럽연합도 갈피를 잡는 상황에서, 정부가 잠시 마비되다시피 했다는 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곧 있을 독일 총선은 유럽연합 전체의 관심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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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최근 미국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이자 세계 최고의 부자 일론 머스크가 갑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자신은 독일의 극우 정당인 AfD를 적극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본래 하던 것처럼 소셜미디어(자신이 소유한 엑스)에 글을 올리는 게 아니라, 독일 신문인 Welt am Sonntag에 기고까지 해가며 AfD 지원에 나섰다. 머스크가 누군가. 트럼프를 당선시킨 인물이다(그가 없었다고 해서 트럼프가 반드시 졌을 선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트럼프의 승리 중 머스크가 차지하는 지분이 큰 건 사실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특정 정당을 위해 목소리를 낸다? 독일 정부와 다른 정당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독일의 지도자들이 일제히 나섰다. 머스크가 독일의 총선에 입김을 불어넣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국민들에게 “소셜미디어를 소유하고 있는 자가 여론을 조작하려 하고 있는데 여기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주관과 의견을 가지고 표를 행사해달라”고 촉구했다. 독일의 선거이니 독일인들의 의견을 모아 결론을 내야지, 타국인이 우리 대신 지도자를 뽑게 하지 말자고 애국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러자 머스크는 숄츠 총리를 ‘바보’라고 부르며 “어차피 다음 총선에서 질 운명”이라고 조롱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총리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머스크를 트롤에 빗댔다. “괴물(트롤)에게 먹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말에 일일이 반응하고, 그것에 따라 대중들의 의견이 갈리는 것 자체가 그에게 먹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관심을 주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2. 영국 vs. 머스크
우리가 잘 아는 바, 머스크는 싸움닭 본능으로 충만한 인물이다. 가끔 그 싸움이 정의로울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다. 독일의 극우 정당을 지지한다는 걸 대대적으로 알린 머스크는 숄츠 총리를 한껏 비웃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영국의 스타머 총리와도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영국 정계를 향해 독설을 쏟아놓은 건 지난 해 7월부터이긴 하다. 오랜 기간 집권했던 보수 정당이 물러나고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하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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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계속해서 “스타머 총리는 감옥에 가야 하고, 영국은 선거를 다시 치러야 한다”고 엑스 상에서 주장해 왔다. 그러면서 “미국이 나서서 영국 정부로부터 영국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외에도 누가 엑스에서 스타머 총리를 비판하면 그걸 또 귀신 같이 찾아내 리트윗 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지난 7월부터 머스크가 보여왔던 행적이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갑자기 영국에서 오래 전에 일어났던 범죄 사건을 다시 언급하기 시작했다. 영국 북부 도시들에서 벌어진 아동 성적 학대 사건으로, 파키스탄 출신의 남성들이 수많은 소녀들을 대상으로 그루밍 및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나 영국 전역을 충격에 빠트렸었다. 난민과 이민자들에 대해 적대적인 스탠스를 가지고 있는 극우 세력들은 이 사건을 자주 인용한다. 머스크도 이번 주 이 사건을 들먹이며 재수사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머스크는 갑자기 이 사건에 주목했을까? 당시 스타머가 영국의 기소국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건을 모호하게 묻어버리고,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는 등 피해자들을 보호하거나 범죄자들이 죄값을 치루게 하지 않은 것이 수상하다는 게 머스크의 주장이다. 스타머는 당시 현장에서 사건을 수사하던 사람들의 발목을 잡으려 한 적이 없었고, 사건을 축소 및 은폐시키려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머스크는 피해자들의 안위나 평화보다 스스로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며 “피해자들을 언급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만 주목하는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3. 프랑스 vs. 머스크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머스크가 특별히 마크롱이나 프랑스에 대해 언급하거나, 특정 프랑스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한다고 발표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독일과 영국을 들쑤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크롱은 미국에 적대적이진 않지만, 유럽연합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늘 강조해 왔던 인물이기에, 미국인 사업가 한 사람이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나라들을 뒤흔드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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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번 주 파리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외교 문제를 언급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10년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소셜 네트워크의 소유주가 독일 같은 다른 나라 선거에 직접 개입하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머스크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독일 정부와 머스크 사이에 있었던 상호 비판을 꼬집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대단히 부유한 몇 사람의 손에 확인도 되지 않은 힘을 집중시켰을 때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 역시 ‘머스크’라는 이름만 나오지 않았을 뿐, 그에 관한 이야기였다.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도 나섰다. 유럽연합 위원회가 회원국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다 확고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한 것이다. 특히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정치 상황 및 내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려는 외부 세력에 대해 엄격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만약 유럽연합 위원회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각 회원국들이 독립적으로 그러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도 말했다. 위원회가 유럽 대표로 머스크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든가, 그럴 자신이 없으면 각 나라가 알아서 따끔한 맛을 보여주더라도 뭐라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노르웨이, 스페인 vs. 머스크
스페인의 산체스 총리도 목소리를 냈다. 머스크가 지금 “혐오와 반사회성 가득한 캠페인을 국제적 규모로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넘어가면 유럽에서는 다시 파시즘이 득세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에 유럽인 개개인이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그는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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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체스가 갑자기 나선 건, 머스크가 스페인에 대해서도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머스크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벌어진 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역시 이민자들이 문제”라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주장했다. 이는 난민이나 이민자 등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는 극우 성향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나치가 독일인들을 동원할 때에도 이런 외국인 혐오(당시는 유대인 혐오) 정서를 이용했었다.
요 몇 년 간 유럽의 가장 큰 사회 문제는 단연 ‘난민’이었다. 좌파 성향의 정부들이 인도주의에 입각해 너무 많은 난민들을 받아들였던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난민들이 너무 많아져서 유럽 국가들 본연의 정체성마저 위협을 받게 되자, 더는 난민을 받지 말자는 극우의 목소리가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럽 여러 나라의 선거에서 극우 정당들이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하는 등의 현상이 일제히 나타나기도 했다. 유럽 우경화의 시작이라는 해석도 나오는 중이다.
산체스가 머스크를 비판하기보다 “유럽인들이 정신 차려야 한다”고 강조한 건 바로 이것 때문이다. 머스크와 같은 외부 세력에 동조해 유럽인들 스스로가 유럽 우경화의 속도를 높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영영 발도 못 붙일 줄 알았는데, 어느 새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세력이 됐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노르웨이의 스퇴레 총리 역시 유럽의 지도자들과 머스크 간 불화를 두고 한 마디 보탰다. “소셜미디어에 대한 남 다른 접근 권한을 가졌을 뿐 아니라 경제적인 힘도 대단히 큰 사람이 다른 나라의 내정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상황이 매우 우려스럽다”라는 내용이었다.
[국제부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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