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뉴스= 류종기 한국기업보안협의회 이사] 2025년은 대한민국 보안 역사상 가장 기이하고도 뼈아픈 해로 기록될 것이다. SK텔레콤의 2300만명 유출에 이어 쿠팡에서 발생한 3370만명 규모의 초대형 개인정보 유출 사고는 우리에게 거대한 ‘보안의 역설’(Security Paradox)을 보여줬다.
지난 9월 국가 데이터센터 화재로 발생한 초유의 전산망 마비 사태까지 생각해 보면, 일련의 디지털 사고들은 특정 기업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로 번지는 공포와 보안 체계의 동시다발적 붕괴를 초래했다. 바야흐로 ‘디지털 팬데믹’이라 부를 만한 재난적 상황이다.

[자료: 생성형 AI 이미지]
수천억의 보안 예산을 집행하고, 인공지능(AI) 기반 이상 징후 탐지 시스템을 갖춘 거대 기술 기업들이 무너진 것은 고도화된 해킹 기술이 아닌, ‘기본적인 접근 통제’와 ‘서버 관리 부실’이었다. 마치 최첨단 디지털 도어락과 CCTV로 무장한 금고의 뒷문이 열려 있었던 모양새다. 왜 최고의 기업들에서 이런 후진적인 사고가 반복될까?
물론 외부인 입장에서 기업 내부의 세밀한 의사결정 과정과 운영 현황을 살펴볼 수 없다. 하지만 공개된 사고 경위와 언론보도를 리스크 관리(Risk Management) 전문가 시각에서 재구성해 보면, 이 사태의 본질은 기술적 결함이 아니다. 의사결정자와 실무자의 눈을 가린 ‘인지편향’(Cognitive Bias)이 IT 인프라 운영의 기본 원칙을 무력화시킨 결과다.
① 전략의 착시: 복잡성 편향과 혁신 편향
기업은 종종 ┖복잡하고 새로운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는 전략적 착각에 빠진다.
복잡성 편향 (Complexity Bias): 리스크 관리에서 가장 위험한 믿음은 “복잡한 솔루션이 더 수준 높고 안전하다”는 착각이다. 많은 기업이 기본적인 IT 자산 관리나 계정권한 관리(IAM)를 강화하기보다 관리 포인트만 늘리는 복잡한 보안 레이어를 덧씌우는 데 집중한다. 시스템이 복잡해질수록 ┖관리의 사각지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혁신 편향 (Innovation Bias): 실질적 효용보다 ‘새로움’ 자체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다. 쿠팡은 대만 시장에서 최신 인증 기술인 ┖패스키┖(Passkey) 도입을 혁신 사례로 홍보했지만, 정작 한국 내 레거시(Legacy) 데이터베이스의 접근 제어는 허술했다. 화려한 신기술 도입 성과에 취해, 낙후된 IT 인프라의 취약점 점검과 관리를 챙기는 지루하지만, 필수적인 과업을 등한시한 전형적인 사례다.
② 판단의 오만: 과신 편향과 고정 편향
조직이 거대해질수록 리스크에 대한 감각은 무뎌지고 과거의 성공 경험에 갇히게 된다.
과신 편향 (Overconfidence Bias): “우리 회사는 보안 인력만 수백 명이다”, “세계적 수준의 관제를 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다. 이러한 과신은 내부의 사소한 설정 오류나 운영상의 허점을 ‘리스크’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해커는 보안팀이 방심한 그 ┖자신감┖을 정확히 노린다.
고정 편향 (Anchoring Bias): 판단의 기준점이 과거의 데이터나 초기 정보에 ‘고정’되는 현상이다. “작년 보안 감사에서 무사고였다”, “ISMS-P를 포함해 총 7개의 국내외 정보보호·개인정보보호 인증을 획득했다”는 사실이 기준점(Anchor)이 되면, 현재 발생하고 있는 미세한 트래픽 이상이나 5개월간의 정보 유출 징후를 보고도 “일시적 오류겠지”라며 기존의 안전하다는 판단을 수정하지 못한다.
③ 조직의 침묵: 확증 편향과 집단 동조 편향
경고등이 켜져도 조직 문화가 이를 수용하지 못하면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기제다. 보안 담당자나 경영진은 수많은 로그 중 ‘시스템이 정상이다’라는 가설을 지지하는 데이터에만 집중하고, 취약점을 시사하는 불리한 데이터(Outlier)는 노이즈로 치부해 버린다.
집단 동조 편향(Groupthink Bias): 대형 테크, 플랫폼 기업 특유의 속도전과 성과 지향적 문화에서 자주 발생한다. “서비스 론칭, 비즈니스 로직 변경이 시급하다”는 다수 비즈니스 부서의 의견 앞에서, 인프라 담당자나 보안 실무자가 “보안 검토가 더 필요하다”는 반대 의견을 내기는 어렵다. 만장일치의 환상 속에 치명적인 보안 홀(Hole)은 방치된다.
④ 책임의 왜곡: 프레임 편향과 이기적 편향
사고 발생 직후, 리스크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심리적 방어기제다.
프레임 편향(Framing Bias): 동일한 팩트라도 긍정적인 ‘틀’(Frame)로 포장해 사태를 축소하려는 경향이다. “3천만건 유출”이라는 팩트 대신 “비밀번호 등 민감 정보는 안전하다”는 프레임을 강조함으로써, 경영진과 주주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희석한다. 이는 근본적인 대책 수립을 크게 방해한다.
이기적 편향(Self-serving Bias): 성공은 나의 능력(Internal), 실패는 외부 요인(External)으로 돌리는 심리다. 보안 사고의 원인을 내부의 ‘IT 자산 관리 실패’나 ‘휴먼 에러’로 인정하기보다 “지능화된 APT 공격”이나 “국가 배후 해커” 탓으로 돌리며 면피하려 한다. ‘내 잘못’이 없으면 ‘개선’도 없다.
보안을 넘어 사이버 복원력(Cyber Resilience)과 리스크 관리로
2025년의 사고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보안은 보안 솔루션을 넘어 견고한 IT 인프라 운영 위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보안 사고의 90%는 ‘미지의 공격’이 아니라, 방치된 개발 서버, 패치되지 않은 OS, 퇴사자의 살아있는 계정, API 설정 오류 등 ‘기본기의 결핍’에서 시작된다. 결국 리스크 관리의 실패는 곧 IT 운영의 실패다. 화려한 보안 솔루션과 장비는 모래성처럼 부실한 인프라 위에 쌓은 감시탑일 뿐이다.
이제 기업은 리스크 관리를 방해하는 인지 편향에 대응하는 구체적 처방을 내고 이를 실행에 옮겨야 한다.
첫째, 복잡성·혁신 편향은 ‘단순화’(Simplicity)와 ‘가시성’(Visibility)으로 정면 돌파하라. 보안 아키텍처를 신입 사원에게 2분 안에 설명할 수 없다면 통제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화려한 신기술 도입 이전에 불필요한 도구를 걷어내고, IT 자산의 가시성을 확보해야 한다. “보지 못하는 것은 지킬 수 없다”는 기본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과신·고정 편향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이미 뚫렸다’라는 가정하에 최악을 검증하라. 근거 없는 낙관론을 강제로 끄기 위해 프로젝트 시작 전, 이미 대형 사고가 터졌다고 가정하고 역으로 원인을 추적하는 시뮬레이션(Pre-mortem)을 제도화해야 한다. 과거의 성공 경험을 버리고, “우리는 언제든 뚫릴 수 있다”는 건전한 편집증(Paranoia)을 조직 DNA에 심어야 한다.
셋째, 확증·집단 동조 편향을 깨기 위해 회의 절차에 ‘교차 검증’(Cross-check)을 의무화하라. 별도의 레드팀 조직을 꾸리기에 부담스럽다면, 주요 의사결정 회의 때마다 돌아가며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지정 토론자’를 두는 것도 좋다. 만장일치는 합의가 잘된 것이 아니라 검토가 부족했다는 신호다. 내부 부서 간, 혹은 외부 전문가를 통한 ‘제3자 검토’를 의사결정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넣어라.

▲류종기 한국기업보안협의회 이사 [자료: 류종기 이사]
넷째, 프레임·이기적 편향은 ‘인적 처벌’이 아닌 ‘시스템 보완’에 집중하는 것으로 극복하라. 사고 후 담당자를 문책하는 데 에너지를 쏟으면 조직은 방어적으로 변하고 핑계만 찾게 된다. 대신 산업현장처럼 ‘아차사고’(Near-miss)를 공유하거나 잠재 위협을 먼저 찾아내는 직원에게 인사 가점을 줘라. “실수를 빨리 드러내는 것이 나에게 이득이다”라는 인식을 심어줘야만 은폐를 막고 실질적인 개선을 끌어낼 수 있다.
2026년, 우리가 목격해야 할 것은 화려한 기술의 향연이 아니라, 묵묵히 기본을 지켜낸 기업들의 ‘무사고 기록’이어야 한다. 기업 보안의 최종 방어선은 AI와 같은 기술만이 아니라 편향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며 깨어있는 ‘리스크 인텔리전스’(Risk Intelligence) 역량일 것이다.
[글_류종기 한국기업보안협의회 이사]
필자소개_
류종기 한국기업보안협의회 이사는 25년 간 기업 리스크, 리질리언스 컨설팅을 수행해 왔으며, ISO/TC 292 재난안전보안 전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IBM Security & Privacy Services 보안 컨설턴트와 Cyber Resilience 서비스 리더를 오랫동안 역임하며 정보보호와 IT 재해복구(DR), 비즈니스 연속성(BCP), 전사적 리스크관리(ERM) 분야에서 기업, 기관을 대상으로 컨설팅을 하고 있다. 경기대 AI컴퓨터공학부 소프트웨어 안전 전공 산학협력 겸직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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