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뉴스 문가용 기자] 아무리 위대한 것들이라도 언젠가 잊혀지기 마련이다. 세상이 비틀즈를 잊는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기발한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예스터데이>는, 그 잊혀짐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인간사의 운명을 극소수 팬의 입장에서 그려낸다. 위대한 밴드 비틀즈를 기억하는 건 전 세계 단 세 사람인데 그 중 두 명은 음치이고 한 명은 삼류 음악가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신이라면 어떤 시나리오를 그리겠는가?
[이미지=Netflix 캡처]
영화는 그 삼류 음악가가 비틀즈의 음악을 활용해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리고 나머지 음치 두 명은 이 삼류 음악가의 비밀을 알아채고 추적한다. 그가 어떤 식으로 위대한 음악가 행세를 하는지 멀리서 지켜본다. 삼류 음악가는 높은 곳에 오르면 오를 수록 괴로워지고, 음치 팬 두 명은 그를 추적하면 할수록 그가 고마워진다. 다른 사람의 음악을 도용하면서 승승장구하니 멀쩡한 양심으로는 괴로울 수밖에 없고,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비틀즈의 음악을 그나마 유일하게 들려주는 사람이 이 사기꾼이니 음치 팬으로서는 점점 감사한 마음이 커진다.
이 삼류 음악가(주인공)가 사기를 친 건 맞지만, 비틀즈 음악을 지켜냈다는 측면에서는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분명하다. 인터넷에 비틀즈라는 것이 검색조차 되지 않고, 신기하게도 그가 과거에 샀던 앨범들마저 전부 사라진 상황에서 그는 비틀즈의 음악을 기억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아무리 좋아하는 밴드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전곡을 다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가 재구성한 비틀즈 노래는 원곡과 사뭇 다르기도 하고 가사가 엉망진창으로 꼬이기도 한다. 나중에 두 음치 팬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실수들이 지적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렴, 하마터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것을 꽤나 잘 살려냈으니 이 실수들이 치명적인 결점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사이버 공간은 생각보다 불안정하다. 요즘 들어 각종 정전 사태 혹은 마비 사태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최근 크라우드스트라이크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때문에 불거진 윈도 정전 사태만 보더라도, 우리의 일상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윈도라는 OS가 우리의 모든 사업과 생활 전반에 얼마나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는지, 아직까지도 정확한 피해액이 집계되지 않고 있고, 심지어 그걸 누가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지도 한창 논란이 되고 있다. 그 외에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중요 기반 서비스의 일시적 마비로 소상공인들 다수가 피해를 본 사례들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예스터데이>의 비틀즈처럼 한 번에 사라지는 데이터들이 없지 않다. 게다가 불시에 찾아오는 정전 사태들만 문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불시에 찾아오는 사이버 공격들도 중대한 위협이다. 이들은 심지어 데이터를 노골적으로 노리기까지 한다. 요즘 가장 유행하는 공격 기법은 데이터를 훔쳐서 ‘돈 안 주면 이 데이터 다 공개한다?’라는 식으로 협박하는 것이다. 납치극을 벌이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데이터가 소중한 우리 입장에서는 돈을 안 주기가 힘들다. 최근 이런 방면의 신기록이 수립되기도 했는데, 2023년 랜섬웨어 공격자들에게 피해자들이 지불한 돈이 11억 달러를 넘어섰다. 데이터 납치로 쏠쏠하게 재미를 본 공격자들은 앞으로 더 활기차게 이 사이버 납치극을 벌일 전망이다.
비틀즈가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일이야 일어날 수 없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비틀즈 이상으로 중요한 데이터가 한 순간에 남의 손으로 넘어가는 일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예약된 현실’이다. 일어나지 않았을 뿐 기정 사실이나 다름이 없다는 의미다. <예스터데이>는 ‘환타지’로 분류라도 되지, 데이터 증발 사건은 다큐멘터리만큼이나 엄중한 진실이자 다가올 위기인 것이다. 그렇다는 건, 누구라도 데이터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평소부터 해두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개인적으로 <예스터데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주인공이 비틀즈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는 부분이다. 그는 인터넷 검색을 수없이 해보다가 결국 실패하고서는 자신의 음반 창고를 열어 비틀즈 음반을 찾기 시작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데이터를 찾지 못하니, 오프라인 백업을 뒤지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 장면이 인상 깊은 건 그 음반 창고에 음반이 빽빽하게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실패만 거듭하고, 양로원이나 유치원 행사와 같은 아주 작은 무대만 겨우 전전하는 음악가로 묘사되는데, 그런 그라고 하더라도 평소 대단히 많은 자료를 축적해두고 있었다는 것이 한 순간이지만 뒤에 올 그의 성공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미지=Netflix 캡처]
흔히들 성공의 근처에 못 가는 사람들을 보고 게으르다거나 노력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적어도 <예스터데이>의 주인공이 성공을 하지 못한 건 게으름 때문은 아니었다는 게 이 한 장면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없었던 건 딱 하나, 명곡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창고가 빼곡하도록 음반을 모으고 즐겨 듣던 사람이었지 그냥 음악을 취미 생활 정도로만 즐기면서 ‘왜 나는 성공하지 못할까’를 무책임하게 고민하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던 사람이니 비틀즈의 수많은 노래들을 재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었고, 이는 음치 팬들로서는 할 수 없었던 그만의 업적이었다. 그렇기에 나중에는 그를 소리 없이 쫓던 그 팬들도 결국 그에게 감사하는 것 아닐까.
데이터 보안은 사고가 터질 때에야 화두가 되지만 언제나 ‘평상시 업무’였다. 항상 그래왔다. 요즘처럼 악의에 의해서건 예측 불허의 사고에 의해서건 정전이 일어나고 데이터가 사라지는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음악가로서 성공을 꿈꾸는 사람이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는 양의 음악을 듣고 분석하고 기억하는 것처럼, 데이터가 사라지는 게 무서운 사람은 그만큼 데이터에 시간을 쏟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데이터가 어떤 상태로 보관되어 있는지, 오늘은 그 데이터가 어떤 경로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왜 움직였는지, 그런 후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최종 버전은 어디에 마지막으로 저장되어 있으며,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점검해야 한다.
이건 비단 보안 책임자만이 아니라 소중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일이다.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이 담긴 파일들,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동자와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긴 동영상, 나의 지문이 찍혀 있는 스마트폰 등 다만 보안 담당자나 전문가들에게 책임을 떠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 우리 주변 곳곳에 아무렇지 않게 저장되어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물론 데이터 정리와 관리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엑셀 표만 보면 눈동자가 마치 렘 수면 상태에 돌입한 것처럼 돌아가는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고, 정신이 혼미해서 찬물을 연거푸 들이켜야 겨우 정상 상태로 돌아오는 체질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난 그런 성향이 아니야’라거나 ‘데이터 정도는 사라져도 상관 없어’라고 생각하는 건 무책임하면서 또 시대착오적이다. 얼마나 많은 실수와 악의가 사이버 공간 곳곳에 스며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함부로 아이 사진을 공개하지도, 클라우드 어딘가에 중요 프로젝트 파일을 올려둔 것만으로 안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각종 사이버 사기꾼들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데이터 정리 잘 하는 체질 개선’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예스터데이>가 환타지인 것은 비틀즈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상황이 단 한 사람에게만 부담으로 다가간 것 때문이다. 갑자기 데이터가 사라지는 상황이 환타지가 아니라 현실인 건, 그런 일이 매일처럼 실제 일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 모두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 복구와 후속 절차는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감당해야 하겠지만, 그런 사건들로 인해 더 엄격해지는 보안 실천 사항과 각종 규정들은 우리의 행동거지를 결정하기에 이른다.
해킹 사건은 매일 일어난다. 데이터는 매일 생겨나기도 하지만 매일 사라지기도 한다. 이것은 오늘 해킹 당한 암호화폐 플랫폼이 알아서 자기들끼리 처리할 일도 아니고, 최근 대규모 마비 사태의 원인이 된 MS와 보험사가 알아서 다툴 문제만인 것도 아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더 큰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고, 더 엄격히 지켜야 할 것들이 늘어났으며, 위반시 져야 할 책임이 막중해졌다. 잊혀지는 비틀즈를 떠나보낼 수 없던 <예스터데이>의 주인공이 혼자 했던 일들을, 데이터를 잃을 수 없는 우리 모두가 똑같이 감당해야 할 때다. 자기 데이터에 관해서는 자기가 기본 보안 담당자가 되어야만 한다.
[문가용 기자(globoan@boannews.com)]
<저작권자: 보안뉴스(www.boa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